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볼링장을 자주 갔다. 주위에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다 보니 구기 종목은 가리지 않고 했었는데 볼링도 그중에 하나였다. 당시 최고 기록이 180점이 넘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는 120점대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 볼링을 잘 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맨 앞의 1번 핀을 정면이 아니라 대각선 각도로 1번과 2번 또는 3번 사이를 노려 그 뒤의 모든 핀을 쓰러뜨리면 된다. 일종의 연쇄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팬데믹으로 어수선한 2021년을 맞이하며 이번 새해에는 볼링의 1번 핀 같이 연쇄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 목표 한 가지를 정해보자.
새해가 찾아오면 대부분 최소 3개에서 많게는 10개 이상의 목표를 세운다. 나 역시 운동, 공부, 자격증, 어학, 네트워킹, 승진, 이직, 성과 등등 항목 별로 목표를 세웠던 경험이 있다. 이런 패턴은 사실 직장일 뿐 아니라 집안일도 마찬가지이다. 한주 동안 바쁘게 일하고 맞이하는 주말에 집안을 둘러보면 엉망이다. 분리수거, 설거지, 집안 먼지, 빨래 중 어느 것 하나 멀쩡한 것이 없다. '대청소를 해야 하나?' 생각하지만 결국 대청소는 엄두도 못 내고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치우다 말곤 한다.
몇 년 전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던 해가 있었다. 그래서 그다음 해에는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며 새해를 맞이했다. 나는 소통에 대한 책을 읽거나, 관련한 유명 강사의 강의를 듣거나, 다양한 분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 스스로도 명확히 인지하고 지킬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약속을 나 자신과 했다. 바로 나와 갈등이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기 전에 반드시 그 사람의 입장에서 세 번 생각해보기로 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해봤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했을까?'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진 않았을까?'
'내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 해 나는 모든 갈등 상황에서 이를 적용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신기하게도 세 번 정도 생각하면 상대방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거나, 내가 오해를 했다거나 하는 상황이 제법 있었다. 그래서 세 번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을 대화의 내용과 전혀 다른 대화를 하는 경우가 생겼고 사람과 갈등으로 인한 고생을 덜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갈등 상황만 줄인 것이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직장 생활 전체에 걸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줬다. 이처럼 명확하고 강력한 계획 하나만 잘 세우고 지켜도 직장 생활 전체에 걸쳐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2년 전 몸무게가 인생의 최고점을 찍은 적이 있었다. 대부분 경험이 있겠지만 몸무게가 많이 늘어나게 되면 건강뿐 아니라 생활 전체에 있어서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많다. 옷을 입을 때도 사진을 찍을 때도 스트레스였다. 몸이 항상 무겁고 쉽게 피곤해지니 직장 생활까지 영향을 줬다. 건강과 직장 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판단한 나는 당시 다른 목표를 세우지 않고 오직 체중 감량 한 가지만 목표로 삼았다.
신기한 것은 체중 감량 하나만을 목표로 했을 뿐인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생활 패턴 전체가 달라져야 했다. 새벽 운동을 위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했다. 칼로리 섭취량을 계산하기 위해 매끼 식사를 기록했는데 당연히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멀리하게 되었고 단순히 체중 감량이 아니라 몸이 건강해지기 시작했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몸이 가벼워지자 회사에서 일하는 데 집중력이 생겼다. 쉽게 지치지 않고 평소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되니 당연히 주위로부터 달라졌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는 사람마다 나의 몸과 마음의 변화에 대해 알아봐 주니 그것 또한 기분 좋았다. 그렇게 6개월 동안 10kg을 감량했다. 그 기간 동안 내가 얻은 것은 건강뿐 아니라 직장 생활에서의 자신감, 집중력, 건강한 패턴, 줄어든 피로감 등 너무도 많았다.
코로나로 인해서 해가 바뀌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기도 하고 큰 차이가 없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이럴 때는 거창한 목표나 다양하게 많은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볼링의 1번 핀과 같이 하나만 지켜도 연쇄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 목표를 세워보자. 그리고 언택트 시대에는 굳이 1년 단위로 목표를 세울 필요 없이 달성할 때마다 하나 씩 세워보는 것도 방법이다.
나 역시 평소에도 하나씩 목표를 세우는 편이다. 작년에 회사가 영국에 모기업을 둔 미국 회사에 인수 합병되었다. 당장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직원들이 가장 고민했던 것은 바로 영어 장벽이었다. 국내 회사에서 외국계 회사가 되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히 데이터 분석 컨설팅 회사여서 기술 전문성은 높은 반면 영어 회화가 되는 직원이 20%에 불과했다. 직원들은 '아, 이제는 영어는 피할 수 없구나!' 느꼈다. 그렇다고 당장 무엇을 시작한 직원은 적었다. 이것저것 해야 할 것은 많아 보이는데 한두 명의 직원이 전화 영어를 시작한 것이 전부였다.
대부분 직원은 영어를 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바쁜 회사 생활 속에서 영어에 올인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면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던 참에 동네 도서관에서 영어 회화 문장을 100일 동안 암기해서 실력 향상을 이뤘다는 내용의 책을 발견했다. 하루 만에 책을 독파하고 직원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거다 싶었다. 다음 날 출근해 직원들 소통 공간인 슬랙에 '100일의 기적' 멤버를 모집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그렇게 직원들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0명이 지원했고 100일 대장정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7명 정도가 반환점을 돌았고 3명이 완주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완주한 3명 모두 영어 실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것이다. 글로벌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원어민들과 편하게 의사소통하는 것은 기본, 트레이닝을 직접 진행하기도 했다. 비록 모두 완주하진 못했어도 이것저것 고민만 하고 시도하지 못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나를 정하고 끝까지 밀고 가서 30%가 완주하고, 50%가 반환점을 돌게 하는 것이 백배 천배 낫다고 확신한다.
이직이나 승진을 목표로 하는 경우도 비슷하다. 생각해보면 회사에서 사람을 뽑을 때 정말 필요로 하는 역량이 한두 가지씩 있다. 이때는 많은 장점을 내세우려 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그보다는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한 가지를 역량을 찾아 잘 준비해서 이직의 카드로 사용한다면 승률이 올라간다.
내 경우 외국계 회사 전략 매니저로 이직할 때 내세웠던 장점은 'MBA 출신의 컨설팅 경력' 하나였다. 회사가 정말로 원했던 사람은 오자마자 3개월 컨설팅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MBA 출신의 컨설팅 경력'을 1번 핀으로 준비했을 때 다음 핀들인 '언론담당 경력' '영어 회화 능력' '수상 경력' 들은 인터뷰 때 차례로 언급되면서 자연스럽게 받쳐 주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데이터 분석 컨설팅 회사 임원으로 이직할 때 내세웠던 장점은 'HR 역량을 갖춘 전략 전문가'였다. 당시 전략에 대한 전문성은 외국계 기업에서 7년 넘게 해왔기 때문에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임원으로서 HR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 관건이었고 이 역량을 다양한 모양으로 어필해서 합격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새해 이직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라면 원하는 후보 회사를 정하고 자신의 장점 중에서 어떤 것을 1번 핀으로 세울지 고민해서 그것을 보강하는 계획을 세우면 좋다. 만약 승진을 목표로 한다면, 그냥 일을 열심히 해서는 안되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날 수 있는 한 가지를 내년 KPI 가운데 꼭 포함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준비하고 중간 체크를 해가면서 관리하는 것이 좋다.
1번 핀을 목표로 정하는 경우의 유일한 단점은 1번 핀이 쓰러지지 않을 경우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어떻게든 1번 핀을 쓰러뜨려야 한다. 이때는 <직장 생활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계획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리거나 배수의 진 작전을 펼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예로 체중 감량을 목표로 했다면 모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야 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조절하게 된다. 또 영어 회화 능력 향상이 1번 핀이라면 당장 영어 회화 관련 온라인 스터디 모임에 참여해서 매일 인증샷을 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바로 영어 회화 능력 시험에 등록한다면 자연스럽게 열심히 준비하게 된다.
한 해 동안 열심히 달려왔는데, 또다시 목표를 세우라고 하면 맥이 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목표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는 경험상 목표에 대해 고민하고 시작한 해가 그렇지 않은 해보다는 확실히 작은 것이라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 남은 며칠 동안 나의 2021년 1번 핀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