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파운더즈 아누아의 성공 방정식
‘고객 관점’, 언뜻 쉽게 이해 가는 듯해도 자신감 있게 설명하기 힘든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객 관점'을 명문화된 정의보다 아마존의 ‘빈 의자’로 설명하는 것이 이해가 빠르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가 1990년대 도입한 ‘빈 의자’는 주요 회의 때마다 회의실 의자 하나를 비워두는 기업 문화다. 참석자들에게 ‘이 자리는 이 방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 고객의 자리’라고 말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지표에만 현혹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고객의 목소리를 의사 결정에 반영하기 위한 아마존의 확고한 경영 철학이 드러나는 조치였다.
‘고객 관점’ 개념이 처음 소개된 건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전까지 기업은 ‘물건을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그러다 현대 경영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1954년 저서 ‘경영의 실제’에서 기업의 본질을 ‘고객이 가치를 느끼고 구입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고객이 기업의 주인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이후 아마존을 비롯한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고객 관점'을 자신들의 경영 철학에 녹여 전략 수립과 의사 결정에 반영해 성장을 이뤘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면서 고객 관점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생존과 성장을 이룬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 가운데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기업들을 알아보자.
필자의 집 창고에는 레고 블록을 가득 담은 커다란 박스가 있다. 이젠 성인이 된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 생일 선물로 늘 레고를 원했고 제법 많이 사줬다. 중학생 때는 레고 피규어를 본인 돈으로 수집하기도 했다. 지금은 일부는 책장에 진열되어 있고, 나머지는 박스에 담겨 있다. 10년 이상 아들에게 좋은 추억을 선사했던 레고가 바로 고객 관점의 대표적인 기업이다.
2000년대 초반, 레고는 파산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비디오 게임기의 확산과 유사 제품의 득세로 시장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생존을 위해 빅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했다. 빅데이터 보고서가 알려준 결론은 “비디오 게임에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집중력이 짧고 즉각적인 만족을 원한다. 블록 쌓기 같은 지루한 놀이는 이제 끝났다"였다. 레고의 종말과도 같은 보고서 결과였다. 이에 레고는 블록 크기를 키우고, 조립을 쉽게 하고, 아예 블록이 필요 없는 액션 피규어를 출시했다. 하지만 모두 여지없이 실패했다.
레고는 최후의 수단으로 고객을 관찰해 보기로 했다. 마케팅팀 직원들이 캠코더와 노트를 들고 전 세계 아이들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놀고, 무엇을 아끼는지 관찰했다. 그러던 중 독일의 한 11살 소년의 집에서 회사를 살릴 수 있는 인사이트를 얻었다. 레고 직원이 소년에게 “가진 물건 중 가장 아끼는 보물 1호가 뭐니?"라고 물었다. 소년은 레고나 게임기가 아니라, 한쪽 면이 닳고 해진 낡은 아디다스 운동화를 꺼내왔다.
이게 제 트로피예요. 이 신발의 닳은 면을 보면 친구들이 제가 스케이트보드를 얼마나 연습했는지, 제가 얼마나 고수인지 다 알거든요.
스케이트보드의 진심인 사람들이라면 한쪽 면이 닳고 해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다 안다. 아무리 고가의 명품 신발을 신더라도 그 사람의 실력을 담아내진 못한다. 레고가 이 낡은 아디다스 운동화를 보고 깨달은 것은 아이들은 자신이 쏟은 시간과 노력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난이도 높은 과제를 극복했을 때의 '성취감'이야말로 아이들이 원하는 최고의 가치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 이에 레고는 ‘쉬운 레고’에서 ‘어려운 레고’로의 회귀를 결정한다. 쉬운 장난감을 폐기하고, 더 작고, 더 정교하고, 때론 설명서만 100페이지가 넘는 고난이도 블록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다시 열광했고, 레고는 이후 10년의 고성장 과정을 거쳐 부활에 성공한다.
레고 제품 중에 ‘레고 아이디어스 BTS 다이너마이트 세트’와 같이 우리에게 친숙한 제품도 있다. 특이한 것은 ‘레고 스타워즈’와 같이 ‘레고 아이디어스’라는 별도 카테고리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고 아이디어스(LEGO Ideas)’는 레고의 고객 플랫폼으로, 고객이 원하면 제품이 된다는 것을 시스템화해 비즈니스 모델로 만든 놀라운 곳이다. 레고 아이디어스에서는 누구나 디자이너가 되어 출품할 수 있다. 필자가 실시간으로 접속해 보니 발사를 준비하고 있는 우주선을 탑재한 발사대를 디자인한 사람의 인터뷰가 메인 화면에 있었다. 누구나 직접 조립하거나 3D 프로그램으로 설계한 창작품을 업로드할 수 있다. 전 세계 레고 팬들이 출품작에 대해 투표를 진행하고, 1만 명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내부 심사 대상에 선정된다. 레고 입장에선 출시 전 ‘이게 과연 팔릴까?’ 염려할 필요 없이, 1만 명의 잠재 구매자를 사전에 확보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고객 관점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세스다. 1만 표를 달성하면 ‘레고 리뷰 보드’라는 내부 심사를 거쳐, 제품 안전성, 조립 가능성, 라이선스 이슈, 브랜드 적합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제품화를 최종 결정한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레고 공식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출시된다. 원작자에겐 제품 순매출의 1%를 로열티로 보상한다.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제품 10개를 선물로 받는 것인데, 고객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대우하는 레고의 진심이 느껴진다.
필자가 스타트업에서 CBO를 맡았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확실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것이었다. 가설을 수립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이 만들어진다. 레고의 실패 확률 0%에 가까운, 1만 명의 잠재 고객이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레고 아이디어스’는 경영진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자리 잡았다. 고객의 목소리를 듣는 척만 하지 않고, 고객의 목소리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든 레고의 최근 실적은 어떨까? 매년 사상 최고 매출을 갱신하며, 장난감 시장의 침체 속에서도 선전을 거듭하고 있다.
필자가 잠시 머물고 있는 캐나다에선 이런 말이 있다. ‘캐나다 사람은 세 가지에 진심이다. 자동차, 정원, 그리고 반려동물’ 이 말처럼 캐나다 전체 가구의 60% 이상이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다. 세 집에 두 집 꼴로 강아지와 고양이 등을 키우고 있는 것. 폭설이 내려도 아침저녁으로 반려견과 산책하는 동네 주민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최근 반려동물 가구가 폭발적으로 늘어 600만 가구를 넘겼다. 그리고 반려동물 가구 폭발적인 성장에 따라 반려동물 시장도 가장 뜨거운 시장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 반려동물 시장에 성공 스토리를 써 내려가고 있는 글로벌 브랜드가 있다. 츄이(Chewy)가 그 주인공으로 아마존의 대척점에서 감성적인 고객 관계로 소위 카테고리 킬러로 등극했다. 아마존이 ‘빈 의자’로 대표되는 고객 관점 경영을 잘하고 있지만 못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고객과 감성적인 관계성을 맺는 것이다. 아마존이 세상의 모든 물건을 가장 빠르고 싸게 살 수 있는 이성적인 플랫폼을 추구한다면, 츄이는 반려동물에 집중, 깊이 있는 케어를 제공하는 감성적인 플랫폼을 추구한다. 츄이의 CEO 수밋 싱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경험 중심의 회사'라고 강조하며 반려동물 초상화 서비스를 언급했다.
우리는 약 1,000명의 지역 화가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습니다. 이는 비용이 아니라 경험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반려동물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서비스는 매주 1천 명 정도에서 랜덤으로 보내주는데, 깜짝 선물을 받은 고객들의 SNS 포스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츄이는 이러한 고객 관점 접근 방식으로 매출 76%가 정기 배송 서비스에서 나올 정도로 한번 고객이 되면 팬이 되어 떠나지 않는 구조를 갖췄다. 물건을 파는 것보다 고객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더 진심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다. 많은 플랫폼들이 AI 챗봇을 도입해 효율성을 추구할 때 츄이는 상담원에게 손 편지를 쓰게 했고, 따뜻함으로 규모화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고객에게 조화와 함께 손 편지를 적어 보낸다. 고객이 슬플 때 같이 울어주고, 기쁠 때 같이 축하해 주는 유일한 기업이라는 인식을 고객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간혹 주문 제품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문제가 있을 경우 반품하게 되는데, 이때 반품 안내와 함께 반품 대신 지역 보호소에 기부할 수 있는 옵션을 추가로 안내해 고객들에게 자발적인 기부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필자가 가장 눈여겨본 서비스는 이메일 발송 시 구매자가 아닌 반려동물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다. 사소한 것이지만 츄이가 반려동물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차별화된 고객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고객들은 싼 가격 때문이 아니라 내 강아지 이름을 기억해 주는 유일한 곳인 츄이를 계속해서 구독하고 있다. 츄이는 최근 실적을 살펴봐도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한국 기업 중에도 고객 관점에 집중해 성공한 사례가 적지 않다. 고객 관점에서 시작했을 때 비로소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토스가 대표적이다. "왜 내 돈을 보내는데 공인인증서와 씨름해야 하지?"라는 고객의 질문 하나에서 출발한 것. 토스는 기능 추가가 아닌 귀찮음을 제거하는 데 보유한 기술과 자본을 투자했고, 암호 입력 1회로 끝나는 10초 송금 서비스를 선보여 금융 서비스의 판을 뒤엎었다.
필자는 최근 뷰티 시장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중학생 딸만 봐도 엄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뷰티에 쏟는다. 세포라 등 오프라인 매장을 가도 10대들이 많이 눈에 띄고, 숏폼 뷰티 관련 콘텐츠를 올리는 것도 10대가 오히려 더 활발할 정도로 소비층이 젊어졌다. 이런 뷰티 브랜드 중에도 고객 관점으로 접근해 성공한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다.
많은 뷰티 브랜드가 "요즘 유행하는 성분이 뭐지?"라며 거시적인 시장 데이터를 분석한다. 문제는 젊어진 소비층으로 인해 트렌드가 시시각각 변해서 빠르게 대응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시장에서 고객 관점에 충실한 접근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뷰티 쪽에선 익히 알려진 더파운더즈의 스킨케어 브랜드 ‘아누아(Anua)’도 그중 하나다.
아누아의 성공 스토리는 레고가 2000년대 파산 위기를 극복한 사례와 겹친다. 당시 레고를 구한 게 한 소년이 보여준 낡은 아디다스 운동화 한 켤레였듯이 아누아의 히트작 ‘PDRN 눈물 세럼’ 역시 수많은 시장 보고서가 아닌 우연히 발견한 유튜브 영상 하나에서 시작했다. 고가의 피부과 시술인 리쥬란 힐러의 효과를 보기 위해, 개인이 PDRN 성분이 들어간 인공눈물을 얼굴에 바르는 아주 니치한 행동을 포착했다. 아누아는 단순히 ‘특이한 사람’의 ‘특이한 행동’으로 넘기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고객의 결핍’을 읽어냈다. 고객들은 피부과 시술의 효과로서 PDRN을 원하면서도 통증과 비싼 가격으로 인해 인공눈물을 얼굴에 바르고 있던 것. 아누아는 즉시 이 성분을 화장품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PDRN 세럼을 출시하면서 일회용 인공눈물 용기를 택한 것. “피부과 시술만큼 전문적인 제품”이라고 백번 이야기 하는 것보다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인공눈물 용기에 담아 직관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이와 같은 고객 관찰, 고객 관점 메시징은 고객 설득으로 이어졌고 올리브영 카테고리 1위를 차지해 고객을 믿은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아누아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매출의 90%가 해외에서 발생하는데 그 성공 스토리 뒤에도 고객 관점이 등장한다. 필자가 국내 대기업 빅데이터 프로젝트를 할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고객사가 자사몰을 고집했을 경우였다. 자사몰의 장점은 회사가 고객 정보를 마음껏 분석하고 실험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일반 플랫폼보다 복잡하고 때로는 조잡한 자사몰을 쓰는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아누아는 일본 진출 시 고객 관점을 철저히 따라서 과감히 자사몰을 포기했다. 일본 고객들이 낯선 사이트에 개인정보를 입력하는 것을 불안해한다는 점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결국 고객들이 신뢰하는 오픈마켓인 ‘큐텐(Qoo10)’을 메인 무대로 삼았다. 고품질의 스킨케어를 원하지만 높은 가격으로 인해 망설이는 고객이 많다는 것에서 착안해 일본의 ‘럭키박스(후쿠부쿠로)’ 문화를 활용, 합리적인 가격으로 스킨케어에 입문할 수 있는 세트 상품을 선보였다. 그 결과 일본 큐텐의 시즌 대규모 할인 행사인 메가와리에서 종합 1위의 성과를 거두며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다.
사업의 핵심은 고객이 원하는 것을 잘 만드는 것이고 여기에 집중해야 해요. 그러려면 외부의 압력 없이 오롯이 제품 개발·테스트에 집중하는 게 필요합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외부 투자를 안 받은 이유예요. (이선형 더파운더즈 각자대표 언론 인터뷰 중에서)
레고가 고객을 사업 파트너로 여기며 레고 아이디어스 카테고리 제품을 생산하고, 츄이가 손 편지로 고객의 슬픔을 위로했듯, 더파운더즈의 아누아는 유튜브 영상 속 사소한 행동과 일본 고객의 불안한 마음속에서 답을 찾았다. 성장은 고객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직접 증명한 것. 이런 노력은 실제 매출로도 이어져 최근 매년 2배 이상 성장을 기록 중이며, 특히 2024년엔 전년 대비 3배 성장을 기록했다.
고객 관점은 거창하지 않다. 이론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계산기를 두드려 정답이 나오는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고객을 깊이 관찰하고 고객 입장에서 선제적으로 생각해 보는 기본을 지킬 때, 고객 관점의 제품과 서비스가 탄생한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객 관점을 지킨 회사들 대부분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성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흔히 혁신은 엄청난 기술이나 천재적인 영감에서 나온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아마존, 레고, 츄이, 토스 그리고 아누아의 사례는 혁신의 본질이 아주 심플한 곳에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고객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책상 위 모니터 속 숫자가 아니라, 고객의 방, 고객의 니즈가 담긴 유튜브 영상, 고객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집요함만이 기업을 생존을 넘어 성장의 길로 이끈다.
이번 콘텐츠는 더파운더즈로부터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고객 관점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노력했고, 저도 다시 한번 고객 관찰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