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20분 전. 휴대폰 시간을 보고 있으니 심장 소리가 더 커졌다. 글로벌 프로젝트 심사 보고가 있는 날, 최선을 다해 준비했지만 여러 항목 중에 상대적으로 준비가 취약한 부분이 있었다. 심사에서 유독 그 부분만 깊이 있게 살펴보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계속해서 떠나지 않았다. 4시간에 걸친 심사 보고는 예상과 달리 좋은 분위기로 끝났고 우려했던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위의 경험처럼 기억에 남는 보고가 있다. 이들 보고의 공통점은 보고 직전에 마음이 폭발할 정도로 떨렸다는 것. 물론 중요한 보고일수록 떨리는 편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사회 초년생 때 했던 보고는 늘 어려웠다. 보고 직전에 폭발 직전인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나, 리허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중요한 보고를 앞두고 리허설을 하지 않는 것은 직무 유기이자 자기 태만이다. 내 경우 최소 한 번에서 많게는 세 번 정도 리허설을 한다. 리허설이 중요한 것은 리허설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리허설을 하면서 전체 보고의 논리 전개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자료를 만들 때는 어색하지 않았는데 리허설을 하다 보니 중간에 논리의 비약이 있거나, 중복된 내용이 있거나, 좀 더 자료 보강이 필요한 부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에너지 조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략을 세울 수 있다. 보고의 길이가 10분처럼 짧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30분 이상 보고하는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을 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리허설을 하면서 어느 부분에서 에너지를 좀 더 쏟을 지에 대해 작전을 세워야 한다. 여기서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은 강조를 해야 하는 장표의 디자인에 더 신경을 쓰고, 더 확실한 논리를 세우고, 발표할 때도 좀 더 많은 시간과 좀 더 분명한 목소리 톤을 사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울러 리허설을 통해 시간 관리를 준비할 수 있다. 수많은 보고가 시간 조절에 실패한다. 예를 들어 1시간 보고라면 40분 보고, 20분 질의응답하는 시간이 정해지는데, 대부분 보고가 50분을 넘기는 경우가 많다. 시간 관리에 실패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보고하는 사람은 시간에 쫓겨서 원래 계획했던 흐름대로 보고를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2/3 지점까지 보고가 진행됐는데 이미 시간을 거의 다 소진했다면 남은 1/3 분량은 빠르게 훑고 지나가야 한다. 따라서 리허설을 한 두 차례 하면서 시간이 재면서 보고 자료 분량 조절을 해야 한다. 경험상 실제 보고에서는 리허설 때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돌발 질문이 생기거나 정시에 시작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어진 발표시간이 40분이면, 30분에서 35분 정도의 길이로 자료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둘, 모든 숫자는 back data를 준비해야 한다.
맞춤법이나 표현이 약간 틀린 것은 용서되어도 숫자가 틀린 것은 전체 자료의 신뢰도에 치명상을 준다. 예를 들어 모든 통화가 원화(KRW)로 표시되었다가 갑자기 달러(USD)로 쓰인 표현이 툭 튀어나오면 어떻게 될까? 이후로 통화가 나올 때마다 보고하는 사람도 보고받는 사람도 '저 통화가 정말 맞을까?'를 생각하느라 정작 보고에 집중하지 못한다. 또한 정말 중요한 수치를 표현할 때 계산식이 잘못 적용된 것이 밝혀지면 그와 관련한 모든 장표에서 말하고자 하는 논리가 흔들리게 된다.
따라서 모든 숫자에는 그 숫자가 나오게 된 이력을 담고 있는 back data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숫자 관련한 이슈 제기가 있을 때 언제든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숫자에 대한 의혹은 그 자리에서 바로 풀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사전에 숫자 오류를 바로 잡는 것인데, 무조건 발표자 이외의 두 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발표자가 한번 못 잡은 오류는 몇 번을 봐도 찾지 못하는 경험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때문에 동일한 자료를 여러 사람의 시각으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 내가 보고 받는 입장이라면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준비해라
보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질의응답 시간이다. 보고를 잘해도 질의응답을 망치면 앞선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질의응답을 위해 예상 질문을 생각해놔야 한다. 이런 질문들은 사전 보고 준비 미팅 때 파악해서 답변을 준비하고 리허설 때 최종 점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설탕과 밀가루를 주력으로 하는 식품 회사에서 관세 정책이 설탕산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를 한다면, 당연히 '그럼 밀가루는 어떤데?'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밀가루에도 동일한 관세 영향이 있는지, 차이가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야 한다.
넷, 중간보고 자리를 갖는 것도 도움이 된다.
중간보고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다만 잘 활용하면 좋다. 특히 중간보고가 꼭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바로 보고 방향에 대해 확신이 없을 때다. 모든 보고가 목적과 방향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는 중간 보고를 통해 본인이 현재 잡은 방향이 맞는 지를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중간보고의 완성도는 60% 정도면 충분하다. 중간보고 대상은 임원 보고의 경우 팀장님 정도면 충분하고, 팀장님 보고인 경우에는 팀장님에게 직접 중간보고하는 경우도 있고 중간 매니저에게 부탁해도 괜찮다.
보고 방향에 대해 확신이 없을 때는 중간보고가 필요하다
다섯, 보고에 목숨 걸지 말아라. 보고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물론 보고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보고 역시 전체 업무 과정의 일부이다. 보고만큼, 아니 보고보다 중요한 것은 보고에 들어갈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보고가 아무리 번지르해도 알맹이가 없으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보고에 들어갈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것에 80, 보고를 잘하는 것에 20 정도의 힘을 쏟는 것이 좋다. 콘텐츠가 부실한데 보고 자료를 잘 만들어서 아무리 발표를 잘한다 한들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반대로 콘텐츠는 완벽한데 보고 자료나 발표 실력이 부족한 경우에는 핀잔을 들을지언정 원하는 결과는 얻을 수 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뇌과학자로 유명한 정재승 교수님의 강연 때 봤던 발표 자료이다. 진짜로 볼품없었다. 디자인적인 요소는 전혀 없었고 그냥 장표 한 장 한 장에 본인이 하고 싶은 문장만 나열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콘텐츠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아무도 그 발표에 대해 불만이 없었다. 이건 극단적인 예지만 그만큼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여섯, 의사 결정이 필요한 것은 보고하는 자리에서 바로 확답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라.
보고하는 자리는 일방적인 자리가 아니다. 기브 앤 테이크,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아야 한다. 보고의 성격에 따라 때로는 결정권자의 의사 결정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예산 승인, 인력 투입 또는 채용 승인, 다음 프로젝트 방향 승인 등과 같은 중요한 것에 대해서 보고하는 자리에서 바로 의사 결정을 요청하고 받아내야 한다. 안 그랬다가는 보고는 잘해놓고 나중에 다시 읍소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일곱, 막판까지 포기하지 말자.
학생 시절 우리가 종종 써먹던 벼락치기는 보고 준비할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보고 날짜가 다가올수록 고도의 집중 상태가 되어 그전까지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 번은 정부 정책 변경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사장님 보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장 크기에 대한 여러 자료가 있었지만 통합된 버전이 없고 조각조각 나뉘어 있었다. 이 내용이 보고의 핵심 장표 중 하나였는데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추산이 들어간 버전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고가 있는 날 아침 집에서 샤워하다가 모든 자료를 통합된 버전으로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샤워하고 나오자마자 랩탑을 켜고 통합된 버전을 만들 수 있었다. 정말이지 두 달 정도 고민을 했더니 막판이 샤워하면서 결국 답을 찾은 것이다.
따라서 중간에 과감히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자세도 필요하다. 정확도를 100%까지 올리지 못하더라도 80%, 90%까지 올려도 보고 받는 사람이 괜찮다면 끝까지 올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정말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자세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
중요한 보고를 앞두고 늘 최악의 상황을 예상한다. 정말 아찔하다.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런데 한 번도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물론 늘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최악은 늘 피해 갔다.
앞에서 말했듯 보고는 보고다. 보고를 조금 망쳤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보고를 망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을 잘했지만 보고 자료 준비가 부족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보고 받는 사람이 원하는 보고가 아닌 경우, 즉 보고의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우다.
둘 다 마찬가지다. 다시 제대로 준비하면 된다. 보고의 장점은 대부분 재보고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재보고에서 진가를 보여주면 웬만한 경우라면 만회가 가능하다. 보고 자료 준비가 부족했다면 재보고 때 미진한 부분을 보강하면 된다. 보고의 목적을 제대로 파악 못했다면? 어쩌겠나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새로운 방향에 맞게 미리 준비한 것들을 재배치하고 중요 장표를 업데이트하면 된다.
자, 보고를 망쳤다고 해서 기죽지 말자. 그리고 한 번은 망쳐봐야 보고라는 녀석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를 빠뜨렸다.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프로젝트 결과 보고라면 프로젝트가 2/3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결과 보고를 위한 틀을 짜는 준비를 시작하자. 본인의 업무에 대한 보고라면 최소 1주 전에는 보고 자료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콘텐츠 취합을 완료하자. 진짜 마지막으로, 보고는 신입사원이든 임원이든 부담스러운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 부담을 이겨낸 경험이 많고 적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