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의 전환점, 인생의 전환점
인생이 그러하듯이 직장 생활에도 몇 번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 전환점이 부서 발령, 승진, 이직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일 때가 있고, 누군가와의 대화와 같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일 때도 있다. 내게도 그런 전환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내 일상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 소중한 경험이었다.
당시 갑자기 팀장이 바뀌었다. 새로운 팀장님은 멀찌감치 경험하면서 합리적인 분이라고 생각했던 분이었다.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한번 대화를 해보면 '아, 이 사람과는 말이 통하는구나!' 느낌이 오는 그런 사람. 새로운 팀장님이 그랬다. 마치 함께 오래 알고 일해온 사이처럼 서로 금방 적응해갔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났을 때, 내가 진행하는 업무에 문제가 생겼다. 이로 인해 원래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상황을 잘 정리해서 자료를 만들어 팀장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가 정리한 자료를 바탕으로 팀장님이 멋진 해결책을 알려주기를 바랐다. 어떻게든 방향만 알려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팀장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팀장님은 오히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마크, 그래서 네 의견은 어떤데?
당황했다. 하지만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말을 빙빙 둘러대며 머릿속으로 어떻게 대답을 할지 고민했다. 나는 교과서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답변 말이다. 나 말고 내 옆 자리에 있는 직원도 할 수 있는 그런 답변.
팀장님은 나의 그런 부족한 대답도 진지하게 듣고는 '마크, 너 의견대로 해보자'라며 내가 말한 방안을 그대로 채택해줬다. 그리고 적잖이 당황한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마크, 앞으로는 나한테 문제 들고 올 때 내 의견을 묻지 말고 네 의견을 먼저 얘기해. 네 일은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물론 100% 일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나는 네 의견이 80%만 되어도 내 의견을 얘기하지 않고 네 의견대로 하게 할 거야."
그때까지 나는 스스로 충분히 의사 결정하고 진행할 수 있는 일도 팀장님이라는 안전장치를 이용했다. 나는 문제가 되는 상황을 잘 정리해서 보고하고 팀장님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방향을 주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팀장님의 생각은 달랐다. 본인이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대신, 본인은 나보다 더 넓은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볼 뿐이라고 말했다. 팀장님은 업무의 담당자이면서 문제 원인까지 파악해온 내가 해결책도 가장 잘 찾아낼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경험이 부족한 내가 100% 완벽한 해결 방안을 찾는 건 쉽지 않다. 팀장님 입장에서도 부족한 부분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팀장님은 80%만 되어도 자신의 의견은 꺼내지도 않고, 내 의견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라고 했다. 회사에 직접적인 영향이 가는 일이라면 당연히 본인이 개입되어야 하겠지만, 내가 하는 일 중에는 회사의 명운이 달린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서 80% 정도로 시작해도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서 내가 경험을 쌓고 스스로 사고하고 일하는 실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항상 팀장님의 의견만 바라본 것은 아니지만, 팀장님은 나를 두어 달 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적절한 시기에 나에게 조언을 했다. 그리고 이 조언은 내 직장 생활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로 직속 상사에게 보고할 때는 항상 내 의견을 먼저 얘기했다.
이전에는,
"팀장님, A 프로젝트에 이슈가 생겼습니다. 이번 달에 설치하기로 한 장비 대수가 50대인데, 현업에 확인해보니 품질 문제가 발생해서 실제 설치 가능한 것은 30대라고 하네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라고 보고를 했었다.
하지만 이후로는,
"팀장님, A 프로젝트에 품질 문제로 인한 설치 지연 이슈가 생겼습니다. 이달까지 설치하기로 한 50대 중에 30대만 가능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현업에 알아보니 설치는 지연되었지만 이미 고객과 설치하기로 계약한 장비가 55대라고 합니다. 본사와는 품질 이슈만 해결되면 이번 분기 목표 달성에는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커뮤니케이션하겠습니다. 품질 문제에 대해서는 매주 월요일 업데이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차후에 설치가 한꺼번에 몰릴 수 있으니 다음 달 스케줄을 미리 조정해놓도록 전달하겠습니다."
라고 보고를 하게 됐다.
이전에는 팀장님이 추가로 궁금한 것들을 묻고, 내가 다시 확인을 하고, 다시 팀장님이 가이드라인을 줬다. 하지만 이후로는 팀장님이 나한테 하는 말은 딱 한마디였다
그래, 그렇게 진행해.
많은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내 일이 진짜 내 일이 되었다.' 내 일을 하다가 발생하는 모든 이슈에 대해서 내가 검토하고 대응하고 해결해나가면서 이제는 어떤 이슈가 발생하더라도 떨리지 않았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나에게 팀원이 생기고 경험해보니 당시 탐장님이 존경스러웠다. 내가 초보 팀장일 때는 팀원들이 문제가 생겨서 들고 오면 작은 것까지도 내가 가르쳐줬다. 내 눈엔 뭐가 해결책인지 보이는데, 본인의 의견이 없는 상태로 내게 들고 올 때면 괜히 우쭐한 생각에 내가 해결 방안을 알려줬다. 당시 내 팀장님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팀장님은 '그래서 네 의견은 어떤데?'라고 묻고 내가 고민하고 얘기한 의견대로 진행하게 허락한 것이다. 이건 머리로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좌충우돌의 시기를 거쳐 이제는 팀원과 후배들이 들고 온 방안으로 최대한 진행하도록 돕고 있다. 그랬다. 완성도가 80%인 의견이어도, 그렇게 진행해보도록 도우면 팀원들은 그 과정에서 보지 못했던 것까지 발견해 100%를 채웠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 경험이 다음에 동일한 문제가 생겼을 때 더 나은 의견을 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줬다.
고맙게도 이 일은 직장 생활뿐 아니라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사실 내 일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비단 직장뿐만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사회생활하면서도 늘 있는 일이다. 나는 직장에서 생긴 내 의견을 먼저 찾는 습관을 일상에도 자연스럽게 적용할 수 있었다. 작지만 굉장히 강력한 변화였다. 무엇보다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도 내 의견을 담아 해결책을 찾았기 때문이다. 소소한 아내와의 대화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자기야, 이번에 지인이 대학생, 스타트업 대상으로 커뮤니티를 운영하는데 나한테 전략 강의해줄 수 있냐고 연락이 왔어. 나는 괜찮은데 자기 생각은 어때?"
라고 물어봤다.
이후로는,
"자기야, 이번에 내가 활동 중인 포럼 모임에서 알게 된 지인이 기업은행에서 운영하는 사내벤처를 시작했어. 대학생, 스타트업 직원 대상으로 3달 과정 미니 MBA를 진행하는 형식인데, 나한테 전략 강의를 부탁했어. 그동안 오랫동안 전략 일을 했지만, 나만의 콘텐츠가 없었거든. 앞으로 강의하면서 그동안 내 경험을 녹인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수락하려고.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모임이라 최신 트렌드에 대해서 내가 더 배울 수도 있을 것 같아. 시작해도 되겠지?"
라고 물어보게 됐다.
직장이든 집이든 어디서든 내가 하는 일에 이슈가 생겼다면 팀장, 사수, 멘토, 아내 등 자신이 의지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해보자.
그래서 내 의견은 어떤데?
한 가지, 모든 일에 억지로 적용하지는 말자. 우리가 처음 겪는 일처럼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일도 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일은 평범한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도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