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할 것도 미칠 것도 없다
엄마들끼리 모인 어떤 자리. 아이들 성교육이 문득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요즘 애들은 우리 때처럼 쉬쉬하며 가르쳐서는 큰일 난다’, ‘유아기부터 조금씩 성교육을 시켜야 한다’ 등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 갔지요. 그러다 외동딸을 둔 어느 한 분께서 “요즘은 세상이 흉흉해서 딸 키우려면 마음 졸이고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요. 그러고 보면 아들 키우기가 마음은 더 편할 거 같아요”라고 하셨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혹시 아들을 너무 편하게 키운 결과로 이 세상에서 딸들이 마음 졸이며 살게 된 거라 말하면 심한 비약일까요?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말을 이쁘게' 하면서 남자로부터 쉽게 보이거나 그렇다고 배척 당하지도 않을 적당한 선을 내면화하면서 딸들이 자라는 동안, 우리 아들들은 그저 공부 잘하고 씩씩하면 그만으로 편하게 자라지 않았나요.
저는 아들을 좀 더 불편하게 키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아들 육아’가 ‘육아계’에서 하나의 큰 이슈로 부상했는데요,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남자로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던 차이에 기반해서 여러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자로서의 아들을 이해하게 돼서 아이가 좀 더 말을 잘 듣게 되면 아무래도 ‘아들 때문에 미칠 것 같았던’ 엄마 마음은 조금 편해질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아들 육아’가 다시 이렇게 편해지는 데서 그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들이 커서 살아갈 세상이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까지 ‘아들’은 생계를 이끌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초기 인류는 사냥을 하든 맹수의 잔반을 거둬오든 밖에서 먹을 것을 잘 구해와야 자기 유전자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성인 남성들도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오는 아버지를 모델링하며 자랐을 것입니다. 어려서 얼마나 사고뭉치였든 아이가 제 밥벌이를 할 구실이 되면 부모는 마음을 놓아도 괜찮았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생계라는 것이 한 사람의 노동만으로 충분하기도 어렵거니와 남성의 육체적인 힘이 로봇보다 가치 있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이제는 긴 인생에서 배우자와 협력하여 생계를 일구는 것, 생애주기와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서로의 역할을 바꾸는 것, 그러기 위해 언제든 주양육자가 되고 가사를 돌볼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아들이 장차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계가 흉내낼 수 없는 인간성, 즉 창의적인 사고와 감성 능력을 빛낼 수 있어야 우리 부모들의 걱정 없이 제 밥벌이를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생계'보다 '관계'를 이끌 수 있는 존재로 아들을 키우는 것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딸과 아들은 영아기부터 공감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실험 결과를 믿습니다. 그래서 딸과는 자연스럽게 더 많은 공감을 나누고, 딸의 민감한 감정을 헤아려주려고 애쓰면서 아들에게는 그런 노력을 포기해버립니다. 어차피 그런 능력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맨날 자동차나 공룡, 로봇 타령을 하는 아들과 어떤 공감을 나눌 수 있겠냐고요.
공감 능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공감을 많이 받아볼수록 쉽게 체득됩니다. 그런데 우리 아들들이 부모나 친구 관계에서 이런 공감 대화의 경험이 많이 부족합니다. ‘넌 남자니까 공 차고 게임하는 게 좋다는 거지? 옛다 공 차러 나가라. 그래 게임 20분 더해라’ 이렇게 남자아이의 한 특성만 이해하고 행동을 허용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아이 사람’의 감정과 욕구를 깊이 헤아려주는 것. 우리 아들들에게 그 경험이 많이 필요합니다. ‘공 차러 나갈 생각하니까 신나니?’, ‘오늘 시합에서 져서 아쉬웠겠다’, ‘새로 나온 게임 해보니까 어땠니?’ 비록 부모가 관심 없는 주제라 해도 아이가 그걸 하는 동안 쉼 없이 지나갔던 감정과 생각들에 대해서는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공감 능력이 발달되어 갈 때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더 풍성하게 느끼고 표현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감정도 잘 이해하게 됩니다. 내 감정과 욕구가 이렇게 중요한 거라면 다른 사람의 그것 역시 그러하다는 것도 필연적으로 알게 됩니다.
서두에 언급했던 성교육도 공감 교육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과거와 달리 개방적으로 몸의 만남에 대해 가르친다고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의 만남이라는 것. 우리 아들들이 이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