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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수험생 jcobwhy Jan 26. 2023

29년 만에 바꾸는 냉장고, 1년도 못 쓰는 청소기

D+170 (jan 18th 2023)

전의 글에서도 몇 번 등장한 적이 있는 조이는 딸아이 스쿨버스를 탑승할 때 정류장에서 어린이들의 안전을 관리해 주는 역할인 스쿨가드 여성이다. 60대 초반에 서른 살 아들과 스물넷 딸을 둔 평범한 백인 가정의 엄마이기도 하다. 옛날의 6년 유학 생활과, 지금의 미국 주부 생활 6개월을 통틀어 가장 가까운 일반 미국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오후 십여분씩 대화를 하다 보니, 조이를 통해 일반 미국 사람의 삶과 생각을 많이 들을 수 있다.


오늘 조이가 꺼낸 화두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대형 가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금으로부터 29년 전, 자기가 결혼할 때 마련했던 대형 가전제품들이 최근에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주엔 오븐 스토브 탑이 고장 나더니, 이번 주엔 냉장고가 고장 났다는 것. 그러면서 고장이 났길래 모두 고치려고 했는데, 너무 많이 사용해서 안된다면서 고객센터에서 교체를 권했단다. 그러면서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오븐을 기껏해야 일주일에 몇 번이나 쓰겠냐면서, 두세 번 쓰는 정도인데, 고치지 못할 정도로 고장 나는 것이 어디 있냐는 것이다. 자그마치 29년이나 사용했는데! 29년 쓴 오븐을 아직도 고쳐서 쓰겠다고?!


미국 사람들은 뭐든 고쳐서 쓰는 것에 굉장히 익숙한 편이다. 한국에 비하면 고객 센터와 그 서비스가 굉장히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을 기다려서 서비스를 반드시 받고야 만다. 그러다 보니 짧게는 십수 년에서 수십 년에 이르도록 제품을 사용한다. 금성 선풍기 같이 그 옛날 30년 전에 할머니 집에서나 봤을 법한 물건들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길거리에는 오래된 자동차들이 굉장히 많다. 저 차가 굴러가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싶은 차들도 많다. 10년 정도 된 차들은 오래된 차가 아니다. 20년, 아니 30년 정도는 돼야 오래된 차라고 할 수 있다. 지난번에 장 보러 갔을 때에는 내가 미국에서 15년 전 몰았던, 그 당시 10년이 넘은 98년식 구형 도요타 모델 차를 마주쳤다. 반가우면서도 대단하다 느낀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미국에서 좋은 제품은 만듦새가 튼튼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리와 관리가 편리해야 한다. 어쩌면 한국의 제품들이 미국이라는 거대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전이나 자동차 모두 보증 수리 정책이나 관리 정책을 공격적으로 펼쳐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여튼 미국 사람들은 제품들을 끈덕지게 고쳐서 사용한다.


우리 가족이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 오면서 많은 것들을 새로 구매해야 했다. 다행히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대형 가전들은 새로 살 필요는 없었지만 은근 여전히 구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티브이도 새로 구매해야 했고, 청소기도 새로 구매해야 했다. 스토브탑도 전자레인지도 다 집에 있지만, 밥솥과 에어 프라이어 같은 주방 가전은 별도로 구매해야 했다. 냉장고 세탁기 같은 고가 제품은 없어도, 한꺼번에 다 사려니 각 제품을 모두 유명 브랜드 제품을 사기는 부담스러웠다. 합리적인 가격의 (아마존 파이어 티브이 같은) 협력 제품이나, 온라인에서 중저가 제품을 많이 구매했다. 그래도 밥솥은 처음으로 큰맘 먹고 미국에 진출한 국산 브랜드의 압력 밥솥을 샀다. 결혼 생활 11년 만에 처음이다.


미국에 온 지 6개월 정도가 지나자, 이런저런 제품들이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주로 문제를 일으키는 제품들은 ‘이런 제품이 고장 날 일이 뭐가 있겠어?’ 하는 제품들이다. 먼저 문제를 일으킨 제품은 에어 프라이어다. 에어 프라이어가 고장 나다니! 에어 프라이어가 고장 날 구석이 어디 있다고! 그런데 그 에어 프라이어가 가장 먼저 고장 났다. 내가 쓰는 에어 프라이어는 가장 기본적인 제품인데, 온도를 맞추는 다이얼과 시간을 조절하는 다이얼, 이렇게 두 개의 다이얼로 구성되어 있는 아날로그식 제품이다. 그런데 시간을 조절하는 다이얼의 플라스틱 부분 안쪽이 뭉개져서 안에 실제로 있는 다이얼 철판이 물리지 않아 이를 제대로 돌려주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즉 다른 기능이 전혀 문제가 없는데 다이얼 하나 때문에 사용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청소기도 말썽을 일으켰다. (아니 혹은 일으킬 예정이다) 처음 이주할 때, 아마존에 존재하는 수많은 스틱형 무선 청소기 중에, 다면적인 비교 분석을 통해 가장 합리적인 가격과 가장 좋은 리뷰를 가지고 있는 제품을 구매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청소를 할 때 청소기 헤드가 약간 덜컹덜컹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청소기 본체와 헤드를 연결하고 있는 관절 부분의 플라스틱 고정 핀 중 하나가 빠지고 없었다. 헤드가 분리되거나 조작이 어려운 상태는 아직 아니었지만, 저 상태로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직감할 수 있었다. 


사실 구매처를 통해 고객 센터에 연락해 해당 부품을 요구하면 시간 조절 다이얼이나, 헤드 관절 연결 핀 같은 부품은 우편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전에 회사에 다닐 때도 가끔 우리 회사가 제작한 완구의 부품이 부러져 버렸다며 부품을 요청하기 위해 제작관리팀으로 오는 고객 전화를 돌려받은 적이 있다. 회사의 입장에서 그러한 고객 요청은 그다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소비자로서 그런 요청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다. 왠지 폐를 끼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수십 불에 불과한 물건을 구매해 쓰면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늘 머뭇거리다 새로 물건을 구매해 버리곤 한다.


하지만 이번엔 한 번 요청해 봐야겠다. 환경에 좋지 않기도 하지만, 29년을 쓰고도 계속 고쳐서 쓸 수 있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고작 사용한 지 6개월밖에 안된 제품이 고장 나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지 않은가? 정당하게 요청하고 요구하는 것에 머뭇거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진: UnsplashNo Revi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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