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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수험생 jcobwhy Feb 02. 2023

일 얘기에 빠진 아내들, 아이 교육 얘기뿐인 아빠들

D+181 (jan 29th 2023)

점심 식사를 마친 후의 회사 뒤뜰엔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물고 대화가 한창이다. 대화의 테이블엔 온갖 주제가 오른다. 정치 얘기, 부동산 얘기, 주식 얘기, 해외 축구 얘기, 커리어 얘기 등. 마치 대한민국은 다 자기가 이고 있는 듯, 온갖 비판과 비난을 번갈아가면서 쏟아낸다. 집안 얘기는 잘 꺼내지 않는다. 간간히 자식 교육 얘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저 학원비가 비싸서 허리가 휘어진다는 정도? 그러다 십여분이 지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썰물처럼 모두 사라지고 없다.


반면 초등학교와 유치원이 자리한 아파트의 코너 골목 옆 카페에는 30대 주부 몇 명이 옹기종기 앉아 온갖 대화가 오가고 있다. 주로 아이들 학업, 성적, 혹은 학원, 특별 활동 등의 이야기를 나눈다. 은근 신경전이 장난 아니다. 너무 티 나지 않게 자녀 자랑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이야기에서 교육을 위한 새로운 정보를 캐내야 한다. 은근한 자랑과 수많은 교육 정보가 오가는 장. 그렇게 이어지던 수다는 아이들의 하교시간이 다가오면서 성급히 사라지고 만다.


한국에서 흔히 그릴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다 그렇진 않겠지만, 낯설지 않고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는. 저런 모습을 보며 가감 없이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이기에 그러려니 한다. 비슷한 관심사와 생활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결국 어울리게 되고,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고 살게 되면서 커뮤니티 환경도 새롭게 적응해야 했다. 10년에 가까운 직장생활을 하다가 가정 주부 생활을 하게 되다 보니, 내가 속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확 좁아졌다. 처음에는 대화할 상대조차 없어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내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게 될 기회를 얻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가깝게 지낼 수 있게 된 곳이 한인 교회였다. 외로운 해외 생활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된다. 사실 십여 년 전 유학을 할 때는 같은 나라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필요성을 많이 느끼지 못했다. 젊어서 누구를 만나도 문화적 수용성이 높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학생이라는 확실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런 필요가 높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주부 생활을 하고 있다 보니 소속감이 없기도 하고, 나이가 들면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찾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한인 교회에서 비슷한 환경을 가진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많아지게 되었다. 


예배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같이 하는 시간이 있는데,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나 비슷한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 같은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 같은 또래의 아이를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어울려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나와 우리 가족도 딸아이와 또래의 딸을 가진 다른 가족들과 친해지고, 또 아내와 비슷한 직종에서 연구를 하거나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과 친해지게 된다.


그러던 중 이번 주의 식사 시간 대화는 매우 흥미로웠다. 아이들은 언제나 후다닥 식사를 마치고 어린이 방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강당에서 푸스볼(테이블 축구)을 하고 논다. 우리 테이블에는 초등학교 3~4학년 자녀를 둔 세 가정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비슷한 또래이기도 했고, 여자분들이 모두 과학 분야에서 연구원, 직장인, 박사과정을 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하면 남자분들은 세무사, 직장인 등 모두 자기 일을 가진 분들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이력서를 정리해 놓는 게 좋아요.’


‘그래요?’


‘맞아요. 경쟁사가 있으면 지우너도 하고 오퍼도 받고 하면 연봉 협상에서 유리한 협상이 되죠.’


‘이번 실험은 정말 중요해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축하해요. 유명해지겠네.’


여자분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한 분이 최근 이직을 하셨는데, 오퍼 수락과 이직에 대한 대화가 한창 이어졌다. 각장의 이직이나 연봉 계약 경험을 나누며 더 나은 커리어를 지속하기 위한 토론이 한창이다. 다들 자기 분야에서 한 역할하시는 분 들 이어서 그런지 대화의 깊이도 깊었다.


‘아이가 축구교실에서 실력이 좀 떨어진다 싶으면 간식을 싸 가서 친구들도 좀 달래주고 해야 해요.’


‘아, 그렇게 까지 해야 해요?’


‘그럼요, 저도 그런 적 있는걸요. 그래야 아이가 기죽지 않는 것도 있고.’


‘여름 캠프는 이번 주부터 올라오니까 놓치지 마세요.’


‘네, 안 그래도 아이가 사이언스 캠프를 지겨워해서 이번엔 뭘 할까 고민이에요.’


반대편에서의 아빠들의 대화다. 아이들의 방과 후 교실, 과외활동, 여름 방학 캠프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미국에선 초등학생 자녀들에 대한 다양한 과외활동 지원이 학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고, 아이들을 라이드 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싸커맘, 싸커대디라는 말이 이런 환경에서 나온 말이다. 어쩌다 보니 우리가 식사하는 테이블에선 모두 아빠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함께 모여서 정보를 서로 나누고 현장에서도 대화가 많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식사시간의 대화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 예로 들었듯 한국에선 대화가 성별에 따라 전혀 대화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우리 가정의 환경에선 내가 아이 교육을 위한 다양한 정보를 얻어야 했었는데, 아빠로서 주변에서 정보를 얻는 것이 공식적인 루트 외에 지인 등을 통해 얻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자녀 교육 정보를 얻는 인적 커뮤니티나 온라인 커뮤니티가 ‘엄마’들의 커뮤니티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빠들의 모임에서도 그런 대화가 가능했다. 정보를 얻는 것도 용이했다. 엄마들도 어디에나 있지만, 아빠들도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보기에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것은 사회적 고정관념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아빠들도 자녀 교육과 관련한 대화를 깊이 나누고, 아내들도 커리어와 주식, 부동산에 대한 대화를 오래 나눈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자연스러운 대화 상황을 연출하라 하면 그런 모습을 그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통상적인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성별에 따른 자연스러움이 따로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뼛속 깊이 한국 남자라 그런가, 이번 주 식사 대화가 신선하고 특이하게 느껴진다. 적어도 우리 아이 세대가 되어서는 어떤 성별이 어떤 대화를 나눈다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사회가 되어 있길 바란다.


Photo by Adrià Crehuet Can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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