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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 방구석 주부 Jun 06. 2023

내 아이는 책을 좋아합니다

D+294 (may 22th 2023)

나는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해 엄청난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많은 부분이 아마도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집의 책장을 가득 채운 각종 전집을 읽으라는 부모님의 권유(?)에 시달렸다. 학교에선 어마무시한 양의 필독도서를 통해 아이들을 독서의 길로 압박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니, 독서가 성공의 지름길이니 하며 마치 독서는 바른생활 지표의 가장 바로미터인 듯하게 여겨지며 우리 어린 학생들을 압박해 왔다.


위의 톤에서 느껴지듯, 난 독서와 친한 편의 사람은 아니다. 정말 맘만 먹으면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반대로 바로  저 위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인지, 사십 줄을 넘은 지금까지도 독서에 대한 엄청난 압박감을 느낀다. 책을 읽어야 바른생활을 하고 있단 압박감이다. 그래서 1년에 꾸역꾸역 네다섯 권의 독서를 하는 내가 한국 책 독서를 위해 전자책을 구매하고 전자 도서관 등록까지 마치고 미국에 왔다. 매번 독서를 시도하지만 또 실패한다. 나는 독서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내가 텍스트 정보를 싫어하나 하면 그건 또 사실이 아니다. 나는 아직도 수많은 정보를 텍스트를 통해 얻는다. 뉴스를 보기보다는 기사를 읽고, 영상 검색보다는 문서 검색을 즐긴다. 포탈 등을 통해 하루에 소비하는 텍스트의 양은 그 어떤 사람들 보다도 많다고 자부할 수 있다. 다만 이런 텍스트 소비는 스크린에 국한될 뿐이다.


그런데 아내는 반대다. 아내는 텍스트 소비를 즐기지 않는다. 모든 정보 습득과 검색, 여가까지 철저히 영상 매체에 의존한다. 물론 박사과정 중인 아내가 공부를 하면서 읽어내는 텍스트의 양은 엄청나다. 논문에, 전공서에, 수많은 보고서와 이메일까지. 하지만 일상의 영역에서는 철저히 영상과 시각 매체를 통해 생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공부와 일의 영역에서 너무 많은 텍스트를 소비해야 해서 그에 대한 반사 작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사과정을 시작하기 전에도 그랬다.


하지만 그녀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평소에는 정말 책을 전혀 보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또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단숨에 읽어 내린다. 관심이 있는 분야나 재밌는 책이라면 술술 읽어낸다. 나는 아무리 좋아하는 분야나 관심 있는 내용의 책이라도 일단 시작하면 꾸역꾸역 읽는 편이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다.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아내는 어렸을 적, 독서에 대한 어떤 압박감도 없었다고 한다. 그저 집에 책이 많은 환경이었고, 그걸 읽었을 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책만 읽었고, 싫어하는 내용의 책을 억지로 읽지 않아도 됐다. 누구도 무슨 책을 읽어라 강요하지 않았다 한다. 오히려 책 좀 그만 읽으라 하는 탓에 이불 속에 들어가 플래시 라이트로 책을 읽다가 눈이 나빠졌다고 한다. 그만큼 아내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지금은, 아내의 전공서, 논문 독서를 빼면 내가 책을 더 많이 읽는 편이다. 어쨌든 나는 매주, 매달, ‘독서’를 시도하고 있기도 하고, 완독에 ‘성공’ 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는 독서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고, 아내는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다. 아내와 내 머릿속에서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독서는 노력의 대상이고 도전해야 하지만, 아내는 그런 압박감이 전혀 없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읽으면 된다.


나는 딸아이가 아내와 같이 책을 대했으면 했다. 독서라는 행위 자체에 너무 큰 압박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했다. 책을 좋아하길 바랐다. 그래서 아내와 내가 어떻게 다르게 책을 접하면서 자랐는지를 관찰했다. 가장 큰 차이는 두 가지였다. 바로 독서를 어떻게 대하는가와 무슨 책을 읽었나 하는 것이다.


나는 독서라는 행위에 대해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했다. 독서란 바른생활이라는 것, 해야 하는 것, 이런 가치 말이다. 하면 좋은 것이고 안 하면 나쁜 것이니, 꾸역꾸역 해 왔다. 스스로 부여한(? 물론 절대 처음부터 스스로 부여한 적은 없다. 어렸을 적의 교육이 날 그렇게 만들었겠지) 지나친 행위에 대한 가치가 독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것이 없었다. 무슨 행위든 재밌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안 하면 그만이었다. 독서란 행위 자체에 대해 어떤 가치 판단도 없다. 그저 좋아하는 책, 재미있는 책을 읽는 행위가 독서니까, 독서는 즐거운 일이 된 것뿐이다.


나는 어렸을 적 읽어야 하는 책을 읽었다. 남이 읽으라고 하는 책을 읽어야 했다. 내가 좋아하거나 재미있는 책을 찾아 그 책을 읽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학교에서 읽으라는 책들, 엄마, 아빠가 좋은 책이라며 사준 책들을 읽느라 바빴다. 책을 읽는 행위가 즐거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읽어야 하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없다. 그저 자기가 좋아했던 책들을 읽었을 뿐이다.


그래. 바로 그거다. 독서라는 행위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지 말고, 읽고 싶은 책만 읽게 하자. 그러면 우리 딸도 독서를 아내처럼 좋아할 수 있겠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아이가 독서를 좋아할 수 있게 유도하는 내 시도 자체가 이미 독서에 대한 가치를 심하게 부여한 행위였다. 그러다 보니, 자꾸 알게 모르게 아이에게 책 읽기를 강요하게 되었다. 거기에 재미있는 책을 찾는 과정이라는 명목 아래, 자꾸 또래의 친구들이 많이 읽는 책들을 추천(강요?)했다. 위의 두 가지 목표가 나 때문에 모두 무너져 버렸다.


벌써 또래 친구들은 해리포터도 다 읽고, 수많은 두꺼운 책을 읽는데. (비교 그만!!) 독서를 좋아하는 아이를 만들기엔 글렀구나 싶었다. 그런데…


반쯤 포기한 어느 시점에, 아이의 독서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관찰한 결과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도서관의 매력에 빠져 들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서관 놀이를 하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찾았기 때문이다. 도서관이라고 해봐야 별건 없다. 한국 집 옆에 갓 오픈했던 시 도서관, 미국에 와서 학교에 있는 작은 도서관이 다다. 따로 엄청난 도서관에 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도서관을 오가면서 관심이 있는 책이 생겼고, 읽기 시작했다.


역시 부모의 지나친 관심과 간섭이 아이를 망치는 건가? 하아… 어렵다.


 마침 미국에 오는 시기 전후로 아이가 책에 관심을 가져, 한국어 책과 영어 책을 번갈아 가면서 읽는다. 한국어 책은 미국에 올 때 많이 가져오지 못해서 읽는 책의 수는 적지만, 텍스트가 적은 책들은 아니다. 영어 책은 몇 개의 유명 시리즈들을 학교 도서관에서 알게 돼, 빌려오기도 하고 사서 읽기도 한다. 처음엔 영어 텍스트가 쉽지 않아서 ‘도그맨’이나 ‘캡틴 언더팬츠’와 같은 만화책을 읽더니, 두세 달 전부터 ‘윙스오브파이어’라는 글로만 된 책을 읽더니, 14권을 스트레이트로 끝내 버렸다.


아직 아이인 만큼 책을 읽는 것보다 티브이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을 더 즐긴다. 그렇다고 ‘티브이 그만 보고 들어가서 책 읽어!’ 해 버리면 최악이다. (하지만 불쑥불쑥 올라온다! ㅎ) 그러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막는 것이 독서가 되어 버리니까. 이미 내가 어렸을 적 책을 읽는 양을 넘어버린 데다, 장래희망으로 라이브러리언을 이야기할 정도니 그것으로 됐다 싶어 이제는 아이의 독서에 신경을 끈다.


그나저나… 내가 책을 읽어야 하는데…


Photo by Blaz Phot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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