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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 방구석 주부 Jul 27. 2022

우왕좌왕 제이콥 씨

D-5

아침에 눈을 떠 거실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무겁다. 아직도 많은 물건들이 가방도 쓰레기 봉지도 아닌 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하나씩 차근차근하면 된다며 초조해 말라고 하지만, 난 가슴이 답답해 온다. 나만의 특징인 것 같다. 시간을 계산해 보면 당연히 이번 주 주말까지 마칠 수 있음을 알지만, 그냥 하루빨리 이 모든 물건들이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오전에 처리해야 할 관공서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주민센터(아직도 동사무소가 더 익숙한 세대다)에 가서 해외 체류신청을 하고, 우체국에 가서 친지들에게 일부 소모품들을 나눠주는 소포를 보내야 헸다.


싱글이어서 부모님 댁에 살 때는 이런 건 특별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주민 등록이 부모님 댁으로 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다가 살던 집에서 나와 미국을 가는 거다 보니, 전출은 해야 하는데, 전입을 할 곳이 없는 게 아닌가! 생각보다 정보가 많이 없었는데,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주민센터에서 해외 체류 신정을 하면 주민센터로 주민등록을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민센터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관리사무소에서 관리비 정산을 신청했다. 금요일 오후에 와서 검침하고 관리비 사전 정산서와 장기수선충당금 액수를 알려준다고 하니, 그 금액을 계산해서 집주인에게 송금하면 될 듯싶다. (내 뒤로 들어오는 세입자가 없어 집주인에게 주면 된다) 


늦은 오전에는 어제 예약한 병원에 가서 알레르기 검사를 받으려 했다. 딸아이가 가는 소아청소년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검사의 정확도가 30% 수준에 결과도 다음 주가 되어서야 나온다고 한다. 저기요? 저 다음 주엔 여기 없는데요? 결국 검사는 포기하고 (30% 정확도의 검사를 수만 원을 들여할 필요가 없잖는가) 대시 비상약을 처방받았다. 미국 가서 갑자기 알레르기 반응이 나면 큰일이니까.


병원 진료와 우체국 소포 접수를 마치고, 딸아이가 너무 좋아하는 칼국수 집에서 칼국수와 수제비를 포장해 집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가면 칼국수나 수제비는 사 먹기 힘들 것 같다. 물론 만들기 어려운 건 아녀서 집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지만 (특히 수제비는) 또 사 먹는 맛이 있으니까.


오후에 다시 짐 정리를 시도한다. 점심 먹은 것을 정리하고 나서 짐 정리할 것들을 훑어보는데, 갑자기 사고가 멈춰 버렸다.



가끔 이런다. 특히 눈으로 보기에 할 일이 많아 보이고, 무엇부터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갑자기 머리가 멍해진다. 머리는 멈춘 상태에서 몸은 계속 움직이니 엄청 우왕좌왕한다. 십수 년 전 드라마 조연출 시절 제작진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 ‘우왕좌왕 제이콥 씨’였다. 당시 제작하고 있던 드라마 제목에 비추어 피디 작가들의 별명을 붙이는 게 팀 내에서 유행이었는데, 나의 특징은 바로 ‘우왕좌왕’이었다.


사태 파악을 한 아내는 멈춘 내 뇌는 깨우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내 몸은 세운다. 아내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리고 그새 정리된 몇 개의 가구를 더 버리고, 가방 몇 개를 마무리한다.


이제 이 집에 머무를 날도 4일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세 들어 사는 집에 대단한 애착이 있지는 않다. 이 집에 이사 온 지 불과 2년밖에 안 되기도 했다. 영영 한국을 떠나는 입장에서 큰 애착이 없는 장소에서 떠나는 게, 왠지 알 수 없는 아쉬움을 준다. 어렸을 적부터 다니던 골목, 아이가 첫 운동회를 하던 운동장, 첫 데이트를 했던 번화가 등과는 이미 오래전에 이별을 했다. 큰 추억도 큰 애착도 없는 셋집에서 그렇게 한국과 담담한 이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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