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90 (aug 29th 2023)
딸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이 비교적 분명한 아이다. 거기에 아내처럼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표현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고, 나처럼 그것을 고집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분명한 주관과 그 표현 덕분에 똘똘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편이지만, 또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집부리는 부분이 분명 있다.
일 년 전, 한국에서 미국에 오자마자 아이의 새 학년이 시작되었을 때는 아이가 너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에 겁을 먹을까 봐 여러 가지 새로운 활동에 도전하는 것을 제안하기가 어려웠다. 괜히 섣불리 이것저것 시켰다가 미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그런 사연들을 이미 많이 접한 바 있었다. 미국에서의 초중고 학창 시절에 대한 나쁜 기억 때문에 미국에 사는 것을 극혐 하게 된다거나, 부모와의 관계가 매우 틀어지게 된다는 등의 다양한 최악의 상황들을 많이 들었었다. 지난 일 년간의 아이의 학교 생활은 성적 따위는 상관없이 그저 친구를 사귀고, 소통에 문제가 없는 그런 상태로 적응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우리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아님 우리 아이가 대견했기 때문이었을까. 아이는 학교 생활에 매우 잘 적응했다. 친구도 곧잘 사귀었고, 소통에 큰 문제를 보이지도 않았다. 당연히 영어만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소통에 어려움을 겪으리라 우려했었는데, 그런 문제는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학업 성적도 나름 우수했다. 주에서 시행하는 표준 학습 능력 평가에서 영어 글쓰기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평균 이상의 성적을 내었다. 그 정도면 되었지. 또 ESL 시험도 통과해서 새 학기엔 외국인 영어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 불과 일 년 만에 학교에 잘 적응하고 생활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할 뿐이다.
아니, 사실 그렇지 않다. 내심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할 다양한 활동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면 하고 바랐는데, 그런 부분이 사실 잘 되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는 것 외에 그 어떤 특별 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다른 한국 학생들은 악기도 하고, 축구나 기계체조, 발레와 같은 체육 활동도 많이 한다는데, 그런 부분은 모두 피하려고만 했다. 나는 어렸을 적 할리우드 하이틴 무비를 워낙 좋아했어서, 그런 영화에 나왔던 다양한 활동들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했었다. 그렇기에 우리 아이가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는데, 너무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길래, 다소 실망했다고나 할까.
지난 일 년 동안 아이가 특별히 과외 활동을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하는 합창단, 그리고 2~3개월에 한 번씩 있었던 방과 후 자전거 활동, 그리고 여름 방학 동안 반나절 여름 캠프 2주, 이 정도가 전부였다.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접어드는 시점에 너무 활동량이 적지 않나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새 학기가 시작하고 또다시 학교 등하교를 제외한 여러 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새 학년은 이 학군에서는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이어서 초등학생 때 시작할 수 있는 다양한 과외 활동을 하길 원했다. 크게 두 가지를 하길 바랐는데 하나는 구기 종목과 같은 단체 체육 활동, 다른 하나는 관악기 밴드나 현악기 오케스트라에서의 악기였다.
미국에서는 예체능 활동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활동을 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히 중학교 이후로는 운동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여러 분야 중에서 몇 가지 분야를 선택해서 심화 활동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초등학생 때 다양한 체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찾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아이 같은 경우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미국 학교 생활을 시작하다 보니 여러 활동을 체험하고 자신에게 맞는 종목 같은 것들을 찾기가 쉽지 않으리라 예상되는데, 뭐든지 다 싫다고만 하니 어째야 할지 조금 막막하기는 하다.
지난 학기말부터 오랜 실랑이 끝에 악기 같은 경우는 관악기 밴드에서 퍼커션(!)을 하기로 했다. 밴드 안에서 다양한 타악기를 다루는 포지션인데, 그게 제일 낫겠나 싶었나 보다. 아내는 내심 플루트나 바이올린과 같은 보다 대중적인 악기를 하길 원했었는데, 왠지 그런 것들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걸, 몇 가지 선택권을 주고 고르게 했다. 하지 않는 걸 선택지에서 지우고 선택하게 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퍼커션을 골랐다.
운동은 아직도 고르지 못했다. 사실 초등학교 5학년의 입장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만 11세가 되면 중학생이 되기 직전이다 보니, 완전 초보자로 운동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운동 같은 경우는 단체 구기 운동을 하거나 그럴 경우에는 아시아인 특유의 신체 조건의 불리함 때문에 의기소침한 경우가 많다고 해서 걱정이 되는 부분은 있다. 그래서 테니스 같은 개인 운동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찾되 몇 가지 선택권을 두고, 이번에도 안 하는 선택지는 지우고 고르게 할 생각이다.
그래도 마냥 뭐든 하기 싫어만 하는 건 아닌 듯하다. 학기가 시작되고 학교에서 다양한 활동들에 대한 지원자를 모집하는데, 비록 5번만 나가는 거긴 하지만 방과 후 자전거 활동에 지원했다. 밴드 활동도 흥미를 가지는 듯하다. 목요일 연습시간은 수학 시간하고 겹쳐 참여하지 못하는데, 굳이 쉬는 시간을 활용해 추가 연습시간에 참가한다고 한다. 월말에 있는 같은 학군의 고등학교 풋볼 게임도 참가하겠다고 한다. 아직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듯하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드는 초반이어서 그런지 더 두렵겠지. 그래도 조금씩 자신의 반경을 넓혀가는 연습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가는 딸과 실랑이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이제는 정착에만 신경 쓸 수는 없기에 또 열심히 대화하고 풀어나가야 할 것 같다.
Photo by Jeffrey F Li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