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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수험생 jcobwhy Nov 08. 2023

Trick or Treat

2023년 10월 31일 (이주 453일 차) 크리스마스보다 핼러윈

가을에 새 학년이 시작되면 미국 초등학교는 한국의 3월처럼 새로운 반을 배정받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새로운 학과 수업과 새로운 비교과 활동, 그리고 새로운 친구 사귀기에 열중하던 초등학생들이 열광하는 날이 가을의 끝에 다가오니, 이는 핼러윈이다.


굳이 일기에 핼러윈의 유래에 대해 읊을 필요는 없겠지. 여느 많은 기념일들이 그렇듯, 실제 그 기념일의 유래는 거의 남지 않는다. 특히 미국에서의 기념일이 그런데, 몇몇 의미를 크게 두는 기념일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상징이 되는 비주얼과 대표적인 활동들로만 기념일이 기억된다.


핼러윈도 그중에 하나다. 서양에서 가톨릭의 성인을 기리는 행사와 연관이 되었다는 매우 복잡한 유래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에 와서 남은 것은 호박을 깎아 만든 잭-오-랜턴과 귀신 분장, 그리고 ‘트릭 or트릿’이라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캔디를 받는 활동만이 남았을 뿐이다.


아이들에게는 세상 즐거운 날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그날은 마치 한국의 어린이날과도 같다. 시기적으로도 새 학년이 시작되고 나서 약 두 달이 지난 시점이기도 하기 때문에 적당하게 친분을 가지게 된 친구들과 캔디를 얻으러 가는 재미가 쏠쏠한 편이다.


작년의 핼러윈도 딸아이에게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불과 미국에 온 지 수개월만에 어쩌면 아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특징적인 미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때는 마침 비슷한 시기에 미국을 온 마케도니아 친구 T (전의 글에 자주 등장했던 마케도니아 식빵 누나의 아들이다)와 함께 핼러윈 트릭 or트릿을 했었는데, 미국의 서브 어반 주택가를 돌아다니며 캔디를 얻으러 다니는 것이 꽤나 재밌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아이도 즐거운 경험이었는지, 핼러윈이 지난 후에도 며칠간 내년에는 무슨 코스튬을 입을지 캔디를 어떻게 더 많이 받을지 재잘재잘 떠들었다.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자 문제가 생겼다. 아이가 서서히 사춘기 소녀가 되어가고 있다. 뭔가 어린 시절의 재밌는 것들에 대해 시큰둥해지기 시작했다. 코스튬 이야기를 해보자고 해도 영 시큰둥했다. 그냥 가게에서 파는 아무거나 사서 입으면 되지 않겠냐며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는 통에 아내가 많이 속상해했다. 더 일찍 미국에 왔으면 아이가 더 재밌어했을 텐데, 너무 늦게 와서 재밌는 것들을 다 놓친 것 같다며. 내가 보기에도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아이는 자기 말대로 편의점에서 파는 거미줄이 그려진(!) 판초를 하나 사는 것으로 코스튬을 끝내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은 고작 11살의 트랜지션을 겪는 아이여서 그런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핼러윈 코스튬에 대한 아이의 욕심이 하나둘 씩 생기기 시작했다. 얼굴에 거미줄 헤나를 하고 싶다더니, 아내에게 거미줄 모양 베일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머리는 초록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다고, 약간의 메이크업도 가미하고 싶다고 졸랐다. 아이에겐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아내와 나는 오히려 신이 났다. 나는 아이와 같이 마트에 가서 컬러 헤어스프레이, 핼러윈 헤나 등을 구매했다. 아내는 신이 나서 모처럼 뜨개 도구를 꺼내 고민 끝에 거미줄 모양 베일을 만들어냈다. 최근 수개월동안 ‘몬된’ 틴에이저병을 겪고 있는 듯한 아이의 모습에서 다시 귀염뽀짝한 우리의 딸내미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위에서 말했듯, 작년엔 마케도니아 T와 트릭 or트릿을 다녔는데, 올여름 식빵 누나의 가족이 조금 거리가 있는 마을로 이사를 갔다. 그래서 학교도 전학을 간 상황이라 같이 캔디를 받으러 다니기가 조금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아이의 학교 친구들은 그 부모님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상황이라, 친구들과의 계획을 세우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캔디를 받으러 다니면 안 되겠냐며 물어 왔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가족끼리만 다니면 얼마나 아이가 위축될까, 이런 생각을 하며 애태우고 있었는데, 아이가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요청하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감사했다.


아이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우리와 완전히 같은 동네는 아니지만 차로 고작 5분이면 가는 동네이기 때문에 흔쾌히 그쪽으로 가기로 하고 약속을 잡았다. 다행히 주변 타운십에서는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시간을 정해주고 주택가를 다닐 수 있도록 통제해 주었다. 5시 반에 만나기로 아이 친구의 부모님과 약속을 정하고 컨틴전시 플랜(?)까지 세웠다. 혹시 주변에 방문할만한 집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마침내 핼러윈 당일이 되었다. 평일이기에 학교에선 특별할 것이 없다. 다만 코스튬을 입고 등교하고 오후에 학교에서 전교생 퍼레이드가 있다.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저 입고 온 코스튬을 전교생 학생들과 구경 온 학부모님들에게 선보이는 정도다. 시간도 불과 20여 분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는 아침부터 단장에 온 힘을 쏟았다. 머리가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다며 엄하게 엄마한테 성질을 부렸다가 목소리가 커지는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고 단장을 마쳤다. 머리카락은 녹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얼굴엔 엄마가 만들어준 거미줄 베일을 했다. 곳곳에 거미줄 헤나를 하고 네일아트도 잊지 않았다. 거의 처음으로 립스틱까지 바르고, 거미줄 판초까지 입으니 그 의상이 매우 독창적이다. 약간의 트러블은 있었지만 그래도 순조롭게 의상 단장을 마치고 등교했다. 아침부터 한바탕 전쟁이었다. 


오후 퍼레이드 시간이 되었다. 수많은 학부모들이 이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학교를 찾는다. 그 드넓은 미국의 학교 주차장이 차로 가득 차고, 주변 주택가 차로변도 자동차로 가득 찬다. 가로 세로 두세 블록 안에는 차 세울 곳이 없을 정도다. 아내는 학교 때문에 시내에 나가서 나라도 꼭 가야 한다. 아이가 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엄마 아빠를 찾는데 없는 것처럼 속상하는 일이 없으니까.


K학년부터 5학년 순서로 각자의 코스튬을 입은 채 학교 주차장을 한 바퀴 돈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핼러윈 분장엔 진심이다. 구매를 해서 입은 친구들도 많지만, 아빠 엄마가 손수 만들어 준 의상을 입은 친구들도 많다. 올해의 히트 코스튬은 여름에 개봉했던 바비와 넷플릭스 시리즈 웬즈데이가 아니었나 싶다. 누구나 뻔히 알 듯한 다양한 캐릭터들의 향연. 그중에도 우리 아이가 가장 독창적이라 자평한다. 내 딸이니까. 그래도 사실이다. 뻔한 캐릭터 코스튬이 아니라, 거미줄을 온몸으로 형상화했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그런 표현을 했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아직 진정한 핼러윈 행사는 시작도 안 했다. 진정한 핼러윈의 정수는 트릭 or트릿에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 신성한 의식(?)에 아이와 함께 하기 위해 학교에서 급하게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딸의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혹시 늦는다고 초조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아이 친구의 집에 도착하자, 아이 친구들이 다 같이 모여서 딸아이만을 그야말로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차가 도착하고 창문을 내리자 아이들끼리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다. 나나 아내 모두 집에서 우리 셋만 있는 모습을 보니까, 그런 모습은 상상을 못 했는데, 친구들끼리 비명을 지르고 좋아하고 수다 떠는 모습을 보니 매우 생경하다.


이제 캔디를 얻기 위한 아이들의 여정이 시작된다. (굳이 번역하지 않고 캔디라 적는 것은 캔디는 사탕이 아니기 때문이다. 캔디는 그야말로 초콜릿, 사탕, 젤리와 같은 간식의 총합이다)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르고 큰 목소리로 ‘트릿 or 트릿’이라 외치면 집주인이 나와 아이들에게 캔디를 나눠준다. 친구들이 함께 모여 같이 다니니 용기가 넘치나 보다. 혼자라면 절대 쉽게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캔디를 달라고 하지 못할 텐데, (작년만 해도 그랬다) 이번에는 거의 무적 원정대다. 다짜고짜 문을 두드리고, 큰 목소리로 외친다. 


“Trick or Treat!”


아이가 모은 캔디는 아이의 호박 바구니를 세 번 채울 정도로 가득 넘쳤다. 물론 캔디를 넘치게 받은 것도 신이 났겠지만, 친한 동급생들끼리 함께 모여 해 질 녘까지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을 어찌나 신나 했는지 모른다. 학교만 끝나도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의 거의 없는 딸아이에게는 정말 신나는 하루였으리라 생각한다.


핼러윈은 이래야 하는 날이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면서 코스튬을 입고 마을 곳곳에 돌아다니고, 집집을 찾아다니며 캔디를 받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이렇게 사회화 과정을 겪는 하나의 즐거운 놀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날 아이에게 그 경험을 줄 수 있었다는 것에 매우 만족스럽다.


벌써 초등학교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기에 당장 내년에도 이렇게 핼러윈 캔디 원정대 여정을 나서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당장 올해도 처음에는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척(!) 했으니까. 그래도 아직은 아직은 우리 꼬맹이가 동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모습 그대로.


   

핼러윈을 주제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심적으로 어려웠습니다. 작년에 한국에서 있었던 그 참사가 마음을 참 무겁게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핼러윈’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부재가 문제이기에, 오히려 담담하게 저희가 경험한 핼러윈을 나누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들의 명복과 유가족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Photo by Conner Bak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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