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7일 (이주 460일 차)
핼러윈이 지나고 주말이 지나고 나면 미국은 본격적인 겨울 분위기를 낸다. 핼러윈이 지난 주말에 일광절약시간이 끝나고 나면 오후 다섯 시 즈음에 해가 져 버린다. 물론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날씨도 쌀쌀해지고 이제 곧 겨울임을 조금씩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날씨가 쌀쌀해지는 때에 학부모들을 긴장시키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아이 학교의 학부모 상담 시간이다. 미국의 학기 구성이 한국과는 다르기 때문에 날씨가 추워지는 이때에 학부모 상담을 하는 것이 아직은 어색하기만 하다. 한국에서는 학부모 상담은 보통 (당연히) 봄에 한다. 학기가 시작하고 한두 달 정도 지난 시점에. 어쩌면 당연하다. 미국에선 학년이 9월에 시작하니, 한국에 봄에 상담을 하는 것처럼 미국에서 날씨가 쌀쌀해지는 지금 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작년 8월에 미국에 처음 왔으니까, 학부모 상담은 이번이 두 번째다.
작년의 학부모 상담 때는 긴장만 가득했다. 아이가 한국에서 학교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미국에 왔으니,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적응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영어를 제대로 준비시키지도 못했는데, 과연 선생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을지, 학업 성취도가 부족하지는 않을지, 아니면 아이들과 친구 관계는 잘 맺고 어울릴 수 있을지, 모든 것이 걱정이었다. 다행히도 잘 적응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에 크게 안심했었다. ESL 클래스를 통해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적응 과정도 착실히 거치고 있다면 안심시켜 주었다. 실제로 딸아이는 학교에 잘 적응하고 만족하며 학교 생활을 했다.
지난 1년간 나와 아내가 우리 아이에게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 아이 미국 생활의 거의 전부는 학교 생활이니까, 학교에 잘 적응하기만 하면 되었다 싶었다. 그래서 교과 활동에서 성적이 A가 나오고 B가 나오는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A만 받는 불행한 생활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상담 때 학업 성취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중요하지 않다 생각했었다.
새 학년에 올라오고 나서도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교과 과정에서 잘 모르겠는 것들은 아빠 엄마에게 빨리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은 아이에게 수시로 했다. 만약 어렵거나 잘 몰라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자신이 친구들에 비해서 뒤쳐져서 자존감이 흔들리게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 상담을 하더라도 교과 과정이나 학업 성취도에 대한 부분은 질문 대상에 있지도 않았다.
다만 아이가 점점 사춘기가 다가오니까 올바른 태도와 말투, 그리고 바른 자세로 사회생활을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매너를 지키면서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선생님과 상담하면서 확인하고자 하는 생각이 컸다. 최근 부쩍 태도가 좋지 못하거나 말투가 퉁명스러워서 상대방들에게 오해를 사거나 불쾌하는 경우가 있겠다 싶은 아이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 한국과 미국 사이에 예의나 매너에 대한 문화적 차이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교육시키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아이의 행동이 전혀 다른 의미에서 오해를 부를 수도 있었다.
마침내 아이의 5학년 첫 번째 쿼터가 끝나고 아이의 학부모 상담 날이 되었다.
아내와 나는 매우 긴장한 채 학교로 향했다. 학부모 상담일은 학교가 쉬는 날이라 부모가 모두 학교에 가려면 아이와 함께 가야 한다. 아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학교에 가는데, 아이와 함께 가다니. 물론 밖에서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아이러니다.
이번에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30년 이상의 교사 경력을 가지신 베테랑 선생님이었다. 아내와 달리 내 입장에선 처음 뵌 것은 아녔고, 학기 초 오픈 하우스 때 아이와 둘이 가서 뵌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학기가 시작한 지 불과 2주가 안된 시점이었는데, 아이가 미국에 온 지 1년밖에 안되었으니 잘 부탁한다고 내가 이야기를 했었고, 선생님은 무척 놀랐었다. 언어도 그렇고 친화력도 그렇고 당연히 이곳 토박이인줄 알았다면서.
이 선생님과의 상담은 매우 놀라웠다. 오늘 상담에서도 지난번 이야기와 같은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더니, 전혀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아이가 언어적으로 다른 친구들과 전혀 수준 차이가 없어서 불과 지난 학기까지 ESL 수업에 참여하던 아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면서, 학업 성취도도 매우 좋아서 ‘영재 수업’ 참여를 위한 테스트에 참여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영재 수업이라니!
물론 미국에선 ‘영재’라는 대상이 한국보다 포괄적이고 범위가 넓은 편이다. 한국에서처럼 ‘멘사’로 대변되는 천재들을 따로 모아다가 대단한 별도의 교육을 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일주일에 몇 번 있는 학생 맞춤형 수업 시간에 심화 학습 과제와 함께 수업을 진행하는 정도이니 대단히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그 수업을 당장 듣게 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대상이 되는지 테스트에 참여해 보자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 아이가 그런 대상이 되다니, 놀랄 일이었다.
나와 아내가 더 놀랐던 가장 큰 이유는 불과 1년 반 전 한국에서 있었던 학부모 상담 때문이었다. 그때는 한국에서의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이었다. 그때 선생님은 아이가 잘 지내고 있지만, 아이의 학업 성취도가 걱정된다면서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일부분 종용하는 느낌의 상담을 했었다. 당시에는 팬데믹 직후였기 때문에 아이들의 사교육 여부에 따라 학업 성취도에 대한 격차가 심하다고 한창 떠들던 시기다. 아이가 1년 반 동안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었을 텐데, 아이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관점이 너무 판이하게 다른 것 아닌가?
이 이야기 말고도 선생님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매우 예의 바르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마 모녀 사이에는 갈등이 있겠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을 거라면서, 딸을 둔 선배 부모로서의 조언과 충고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소개해 주었다.
오늘의 상담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책임감과 열정이 넘치는 은퇴를 몇 해 앞둔 미국의 초등학교 선생님의 확고한 교육 목표의식과 방향성 또한 놀라웠고, 그분을 통해 들은 우리 아이의 강점과 보완할 점을 잘 설명해 주신 것도 놀라웠다. 뿐만 아니라 선배 부모로서 전해주는 진심 어린 조언도 신선했다.
아이가 대견하게 미국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해서 나름 성과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 매우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나와 아내도 완벽하게 태어난 아이 적어도 망치지는 않았구나 하는 맘에 각자를 격려하고 안도했다. 물론 양육에 있어 아직도 수많은 여정이 있을 것이고 역경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의 이 상담은 우리가 아이를 키우면서 보람을 찾을 수 있었던 작은 포인트였음에 매우 감사하다.
Photo by Adam Winge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