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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수험생 jcobwhy Nov 29. 2023

소비의 나라에서 애써 소비 외면하기

2023년 11월 24일(이주 483일 차) - 블랙 프라이데이

미국은 소비의 나라다. 잠깐이라도 미국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특히 한 해의 하반기는 정말 미국 사람들에게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학년의 시작에서부터 핼러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에 새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쇼핑의 계절이다.


미국 사람들의 소비는 그저 물건을 구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명절이 다가오면 해당 명절에 어울리는 요리를 하기 위해 식료품을 구매하고, 그 요리를 담을 그릇을 별도로 구매한다. 사소한 컵이나 식기류도 명절의 테마를 담은 것들로 교체한다. 온 집을 꾸밀 인테리어 소품도 바꾸어 준다. 벽에 걸린 장식품, 현관문 앞 장식품, 마당을 꾸밀 수많은 장식품들을 구매한다. 물론 매해 새로 구매하지는 않겠지만, 낡은 것을 교체하고 하다 보니, 인테리어 소품 매장엔 절기마다 새로운 테마 물건들이 즐비하다.


이런 소비는 핼러윈을 시작으로 한 달 간격으로 있는 절기에 절정에 이른다. 10월부터 핼러윈 분위기로 식기를 갈아주고, 집안 인테리어 테마를 변경한다. 앞마당엔 서로 경쟁하듯 무서운 분위기의 장식들로 어린이들을 유혹한다. 11월엔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난다. 추수감사절은 미국 전통 가정식이 메인이 되므로, 장식도 중요하지만 식기와 식재료가 더 중요하다. 미리 커다란 냉동 터키와 함께 스터핑을 위한 재료, 감자, 크랜베리, 그레이비소스 재료들을 준비해야 한다. 물론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나뭇잎 장식이나 솔방울, 붉고 노란 각종 장식물을 구매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추수감사절을 넘기자마자 바로 성탄절 준비에 나선다. 농장에서 대형 트리를 계약하고 배송 일정을 잡는다. 단독 주택 전체를 덮는 전구 장식은 참으로 화려하다. 한 달 동안 자녀나 손주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고, 역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빨갛고 초록색 장식과 식기들이 식탁에 올라간다.


위에 이야기한 각종 소비는 크리스마스 장식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에선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소비다. 미국에서 이 세 달간은 정말 모든 종류의 소비가 극에 달한다고 보면 된다. 그저 선물이나 사고 특별한 요리를 하는 정도가 아니다.


이 사이에 미국 소비 생활의 화룡점정이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블랙프라이데이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늦가을의 세일을 블랙프라이데이라고 많이 부르는 듯하다. 하지만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는 차원이 다르다. 원래 블랙프라이데이는 미국의 소매점에서 한 해 동안 미리 선구매해서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는데, 연말이 지나고 나면 이 제품들은 구형 제품이 되거나 이월상품이 돼 더 이상 판매하기 어려워지니, 한 해가 지나기 전에 재고를 정리하기 위해 원가 이하의 가격으로 판매하던 영업 패턴에서 왔다고 한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 다른 명절과 다르게 목요일인데 (다른 미국의 휴일은 대부분 월요일이나 금요일이다) 그다음 날인 금요일, 모든 소매 매장에서 블랙프라이데이라는 이름으로 덤핑 세일을 진행한다.


거의 모든 제품이 매우 저렴하기 때문에, 평소에 사고 싶었던 물건을 잘 봐두었다가, 이때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하는 현명한 소비가 필요한 시기다. 한국에서야 거의 모든 물건을 온라인으로 최저가 구매가 가능하기 때문에 소매점을 찾아다니며 쇼핑을 하는 문화는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미국에선 아직도 각종 소매점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사는 것이 더 편리한 점이 많다. 배송이 빠르지도 않은 데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양질의 물건을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블랙프라이데이만 되면 툭하면 반값, 이러니 굳이 온라인 쇼핑의 메리트가 없기도 하다.


이번에 미국으로 이주해서 두 번째 맞는 블랙프라이데이엔 이런저런 쇼핑을 할까 생각을 해봤다. 첫 해엔 새로운 도시에 이주한 지 불과 세네 달밖에 안 돼서 쇼핑 여건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 포기한 면이 없지 않았다. 다만 한국 밥솥이 필요해서 온라인몰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을 활용해 한국 밥솥을 40% 정도 저렴하게 구매했다. (밥솥이나 전열기구는 한국 물건은 220V전용이어서 미국에서 사용하려면 변압기가 필요하다. 미국 전용 물건을 별도로 구매해야 한다) 이번에는 한번 당일 쇼핑에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우리가 뉴스에서 가끔 보았던 진격의 월마트 오픈런 같은 그런 블프 쇼핑 말이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다.


첫 번째 이유는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벌이는 쪼그라들었다. 박사 유학 생활은 학교에서 적지 않은 생활비를 지원해 준다고 해도, 일정 부분 마이너스 가계를 꾸릴 수밖에 없다.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은 필수품에 대한 소비도 많지만, 일정 부분은 잉여 소비인 경우가 많다. 꼭 필요하진 않지만 갖고 싶었던 위시 리스트 소비에 특화되었다고나 할까? 필수 소비는 시기를 미루거나 늦추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특정 세일을 기다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이너스 가계를 꾸리는 입장에서 잉여 소비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곳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직도 사야 하는 필수품이 많았는데, 이번엔 뭘 사려고 해도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해마다 벌어지는 블랙프라이데이 쇼핑몰 총기 난사 사건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 지역에서 대규모 총기 난사 사건을 겪은 적은 없다. 하지만 심심찮게 뉴스에선 이런저런 총기 난사 사건을 보도한다. 특히 블랙프라이데이는 이런 뉴스가 많이 나는 시기 중에 하나다. 워낙 많은 인파가 쇼핑몰에 몰리기 때문이다. 쇼핑몰 총기 난사 사건이 뉴스에 나오면 자료 화면에 늘 등장하는 쇼핑몰의 모습이 있는데, 우리 지역의 쇼핑몰도 똑같이 생겼다. 막상 블랙프라이데이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기에 가려고 생각하니, 그 뉴스 클립 그림이 우리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그래서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더라.


마지막 이유는 블랙프라이데이 세일 수준의 할인 행사가 많아진 것이다. 전에는 할인 행사가 있다고 해도, 블랙프라이데이와는 비교가 어려웠다. 물론 아직도 쇼핑몰을 방문하면 말도 안 되는 덤핑 가격의 물건을 구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세일 범위는 30~50% 수준인데, 요즘은 아마존 프라임 데이나, 아니면 상설 할인 리테일 스토어에서도 그 정도 범위의 세일을 많이 하는 편이다. 오랫동안 필요해서 고민했던 편집용 4K 모니터는 상반기 아마존 프라임 데이 때 180불에 구매했고, 아이의 두꺼운 겨울 패딩은 상설 매장에서 50불 수준의 가격으로 구매했다. 정말 꼭 구매해야 하는 고가의 가구나 고급 가전이 아닌 이상에야 블랙프라이데이를 기다릴 필요가 점점 더 없어지고 있다.


그래서 애써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를 외면했다. 아내의 생일이 늘 추수감사절에 끼어 있어, 아내의 근사한 생일 선물도 생각해 보았으나, 아내는 이번에 추수감사절 직전 학교에서 받은 최신 VR 기기에 흥분해 있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단다. 아내가 원한 건 십수 불밖에 안 되는 VR 게임 타이틀 하나가 다였다. (그나마도 블랙프라이데이 할인으로 싸게 구매했다)


워낙 소비를 즐기지 않는(즐길 수 없는) 성향이라 미국의 광적인 소비 생활에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의 우리 가족이 블랙프라이데이라며 쇼핑백이나 비닐봉지를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땐 우리가 미국에 완전히 정착했다고 할 수 있을까? 


Photo by Justin Li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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