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유행어 및 시사용어로 "블랙 기업"이라는게 있습니다.
가혹한 근로시간, 짜디짠 급여, 이상한 조직문화 등 나사가 하나씩 빠져있거나, 혹은 전부 빠져있어서 근로자의 육체적/정신적 피폐를 불러오는 회사를 말합니다.
반대말로는 흔히 "화이트 기업"이라고 합니다.
일본에 온 이후로 두 번째로 근무한 회사가 바로 이 "블랙 기업"의 정의에 딱 맞는 회사였습니다. 모 상장 IT벤더였는데 별로 추억하고 싶은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은근히 채용공고 많이 올라오고 입사/퇴사가 잦은 회사라, 한국분들도 종종 입사하시던데... 일본 취업 혹은 이직 생각하시는 분들은 개별적으로 말씀 주시면 회사명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얼마나 '블랙' 이었을까요?
1. 직종 변경
원래 재무팀(회계팀) 입사를 희망하여 면접을 보았으나, 입사해보니 TO가 찼다면서, 새로 만들어진 오퍼레이팅 컨설팅 부서를 추천 받았습니다.
알아보니 해당 TO는 저랑 동시에 면접을 본 다른 지원자를 이미 채워넣었고, 모른 척 하고 채용절차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지금같으면 백수가 되든 말든 당장 때려쳤겠지만, 당시에는 비자 문제도 있고 해서 당장 백수가 되면 곤란했기 때문에 일단은 받아들였습니다.
해당 오퍼레이팅 컨설팅 부서는 타사에서 컨설턴트 한 명 영입해서 뚝딱 만들어진 신설 부서로, 인원도 저 포함해서 고작 5명 밖에 없었습니다. 불길함을 느꼈습니다.
2. OJT란 없다.
신설부서에 5명밖에 없었는데, 막상 오사카 쪽에 프로젝트가 있어서 나머지 4명은 오사카에 있었습니다.
약 3주 정도 방치되었고 여기서 큰 불길함을 느낍니다.
적어도 명색이 자사제품을 주로 판매하는 벤더였으면 자사제품 교육 정도는 시켜줘야지...
3주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곧장 현업 투입입니다.
3. 물도 없다.
말 그대로입니다. 회사에 물(정수기, 생수 등)이 없습니다.
사실 일본에서는 영세기업의 경우 물도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곤 하는데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놀랐습니다. 물론 물이 없다고 블랙은 아니지만 블랙은 대개 물이 없습니다.
일본에 보면 출근시간대에 직장인들이 출근하면서 편의점에서 2리터 짜리 생수를 사들고 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게 회사에 물이 없어서 그거 사들고 가서 하루 종일 마시는 겁니다.
4. 모니터란 없다.
그래도 부서 자체는 오퍼레이션 컨설팅 부서라, 엑셀과 씨름하는게 주요 일과였는데, 출시된지 4-5년은 지난 똥컴을 주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그게 고작 12인치 노트북이었고, 화면이 작아서 문서 작성 및 편집하기에는 매우 거지같았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모니터 좀 사도 되냐고 `그` 부서장에게 물었더니 네 클라이언트에서 이익을 내면 사주겠답니다.
당연하지만 기타 필기도구 지급도 없습니다.
5. 재량근로제/재량노동제
재량근로제란, 근로시간 관리를 근로자에게 일임하고, 시간 관리를 하지 않는 대신에, 정해진 소정 근로시간(주 40시간이라든지, 월 160시간이라든지) 근무한 걸로 퉁치는 제도입니다.
관리직, 개발자 등 실제로 재량이 주어져야 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건 문제가 아닌데, 고작 사회생활 5년차였던데다가 직급도 고작 시니어였던 제게 재량권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재량근로제는 기본적으로 잔업수당이라는 것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심야 가산분만 나옴) 이렇게 잘못 적용되면 잔업수당만 피해가는 부작용만 남게됩니다.
따라서 주당 100시간을 넘겨도 잔업수당은 없었습니다. 심야가산분은 뭐 고작 몇백엔이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회사에서 동일 직급 중 재량근로제는 저만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 컨설턴트 출신 부서장이 컨설턴트는 그래도 된다고 했다나...
6. 무한assign
5.에 언급한 것처럼 추가 Overtime에 비용이 안들어가니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무한으로 관여 프로젝트가 불어납니다.
7. 출장비는 본인부담
출장가는데 일당없고 숙박비 명목으로 고작 고정액으로 5천엔 줍니다. 실비 정산 아닙니다.
비수기면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데 휴가철 겹치면 본인 돈 깨지는 겁니다. 돈 남으면 가지랍니다.
8. 아침 8시 고객미팅
클라이언트에게는 잘 보여야하기 때문에 클라이언트 시간에 맞춰 8시에 고객사 현지 미팅도 잦습니다. 문제는 여긴 도쿄, 고객사는 교토였을 뿐이고...
도카이도신칸센 첫차는 지정석이었습니다.
9. 사내 매입은 금지
부서별로 관리회계상 손익집계를 하고 사내대체도 다 따져가기 때문에 타부서에게 일을 맡기는 건 절대 금지입니다.
문제는 여긴 오퍼레이팅 컨설팅 부서라 실제 도입, 제품 설치 등의 업무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고, 그런 일들은 고귀하신 몸이 할 수 없으니 말단에게 매뉴얼 하나 주고 다 집어던진다는게 문제였죠.
해본 적 없고 할 수 없다고 반론해도 모르는 과제를 해결하는게 컨설턴트라고 합니다. 그럼 니가 하지 왜 던지니?
결론은 3개월만에 그만뒀습니다.
한국도 전직장 3개월만에 그만두면 의심할 마당에, 이직에 더 엄격한 일본이기에 이직자리 찾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다른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 자체는 상장사여서 체제나 규정 정비는 양호했고 실제로 타부서는 멀쩡했는데, 제가 있던 부서만 그랬으니 이게 블랙이라는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사람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후일담으로는 '그' 컨설턴트께서는 판만 벌려놓고 1년만에 big4 컨설팅으로 이직해서 나갔다고 합니다. 혹시 몰라서 검색해보니 지금도 이직한 곳에서 파트너로 근무 중이네요.
굳이 좋은 점을 찾자면 난생 처음 막장을 경험하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세무사 시험을 준비했다는 점입니다. 편하고 좋은 직장이었다면 시험 준비 안했을 수도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