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창"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지식을 두 가지 관점에서 소중하게 생각했다. 첫째, 지식 자체는 선한 것이므로 이 것을 확대하는 것이 좋은 일이며, 둘째, 지식 특히 자신에 대한 지식을 통해 자기를 계발하여 고매한 성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신전 기둥에 쓰여 있었다는 이 경구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문학과 예술분야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화두이다. 같은 물음이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은 것은 여느 시대 혹은 문화를 막론하고 인생에는 “자기 지식(self knowledge)”이 필요하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직 한 가지 화두를 붙들고 면벽 수도하여 자아를 탐구할 수 있다. 오래전 중국의 선사 종고는 촌철살인, 즉 한 치에 지나지 않는 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듯, 집중하면 일시의 깨달음으로 헛된 생각을 죽이고 자아를 볼 수 있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자신의 한 치 짧은 칼로는 닿지 않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내가 아무리 미간을 좁혀 눈길에 힘을 주어 보아도 볼 수 없는 부분들이 바로 내게 있다는 것이다.
인사 컨설팅 일로 모 회사에 몇 달 동안 파견 나간 적이 있었다. 어느 오후, 머리를 식힐 겸 이발관을 찾았다. 인근 저층 아파트 단지의 낡은 상가 이층에 붙은 “모범 이발소” 간판을 보고 들어갔다. 서울에도 이런 낡은 이발소가 있나 싶었지만, 모범이란 단어에 이끌려 들어갔다. 감기로 코를 훌쩍이는 이발사는 내 목에 쉰내 나는 수건을 감은 다음 그 위에 얼룩진 누런 나이론 천을 두르고 모서리 끝을 잡아 팽팽하게 조였다.
“어떻게 깎아 드릴까요?”
“알아서 잘 깎아 주세요”
칙, 칙, 칙 분무기를 서너 차례 뿜고는 성긴 빗으로 가르마를 타려던 그가 말했다.
“아니 가르마가 가마 반대 방향이네요. 손님은 앞머리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는 마치 그릇된 것을 고치려는 듯, 내 앞 머리카락을 반대로 빗겨 넘겼다. 가르마의 분할선을 만들고는 거울을 보라며 내게 말했다.
“보세요. 더 자연스럽게 보이시죠.”
과연 그렇게 보이는 듯했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이발사들, 미용사들이 내 머리통을 만졌다. 내 정수리에서 가마가 돌아가는 방향을 알려준 사람은 아직까지 그가 유일하다. 그 뒤로 나는 그가 잡아 준 가르마 방향을 따르고 있다. 내가 나의 정수리를 볼 수 없었던 것처럼 누구나 자기 모습을 다 볼 수 없다. 그를 가까이서 본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통해 자신이 보지 못하는 자기 모습을 볼 수는 있다. 물론 여기에도 보는 사람의 선입견과 편견에 따라 관찰 오류가 생긴다.
1955년 미국 심리학자 조셉 루프트(Joseph Luft)와 헤링톤 잉헴(Harrington Ingham)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한 개인의 자기 발견 기회를 잘 설명하는 모델로 이른바 “조하리 창”(Johari window)을 창안했다. 그들의 개념적 모델에 자기들 애칭을 붙여 이름한 것이다. ‘조하리 창’은 60년이 넘도록 자기 이해와 피드백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제시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조하리 창은 아래 그림에서 보듯 네 개의 영역으로 구성된다.
첫째, “열린 영역”은 나 자신이나 같이 소속한 집단의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영역이다. 사호 개방된 이 영역에서 사랑과 우정, 진정한 의사소통과 이해가 이루어진다. 격식이 없어도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지란지교"는 이 열린 영역에서 가능하다. 열린 공간을 확대할 때 조직이나 사회 구성원들의 성장 기회와 생산성은 늘어나고 서로의 관계는 견고해진다. 이 영역을 “Arena”라고 했는데 서로 감춘 것이 없이 서로 공개하고 공유하는 공간이다. 가족 간이나 직장 동료들 간에도 이 열린 공간이 넓을수록 그 집단은 건강하다. 둘째, “가려진 영역(blind area)”은 내 인식의 사각지대이다. 내게는 가려졌으나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있는 영역이다. 내가 나 자신을 볼 수 없으니 남이 피드백해 줘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이 두 번째 영역 즉 맹점 영역을 “Façade”라 칭하기도 한다. Façade란 건축물의 외양 혹은 전면을 뜻한다. 남들이 나의 Façade, 나의 외양을 본다 함은 내 외현적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다. 가락동의 모범 이발소 이발사가 내 정수리에 난 가마 방향을 제대로 일러 준 것처럼 누군가 내게 거울 역할을 해 준다면 내가 필요한 변화를 시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대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으로 그를 판단한다. 그 행동 이면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때로 우리 주관대로 남이 보이는 행동을 해석하면 그의 의도를 왜곡하기 쉽다. 대인 관계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주된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사람의 주관이 아니라 거울과 같이 있는 그대로 비쳐줄 수 있는 객관적인 도구와 방법이 필요하다.
셋째, “숨겨진 영역(hidden area)”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개방하지 않아 그가 나에 대해 볼 수 없는 영역이다. 내 생각과 감정, 기쁨과 아픔, 바람과 실망, 강점과 약점을 드러내어야 다른 사람이 보고 내게 다가올 수 있다. 내면을 스스로 열어 보이는 자아 개방(self-disclosure)이 없으면 내가 스스로 숨이 막히고, 내면 성장이나 치유가 어렵다. 오프라 윈프리의 TV쇼가 전 세계 시청자들의 인기를 끈 주된 이유는 출연자들이 성폭행당한 상처 등 말하기 어려운 내면의 상처를 자발적으로 드러냄으로 심적 억압에서 해방되는 감동을 주기 때문이었다. 보다 성숙한 사람이나 훈련받은 사람이 한 사람의 닫힌 마음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려 스스로 그 문을 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자아의 개방을 통해 그를 억누르던 기억에서 그는 자유로울 수 있고 변화를 시작해 볼 수 있다.
넷째 영역은 내가 나에 대해 알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없는 미지의 영역(unknown area)이다. 내 속에 있는 적성과 성격, 가치, 동기 요인, 축적된 경험과 기억 등이 미래의 환경 요인과 어떻게 상호 작용을 일으켜 어떤 결과를 산출할 수 있을지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지혜의 등불을 켜면 내 속에 있는 미지의 동굴을 어느 정도 비춰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문답을 통해 상대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도록 도왔다. 상대에게 자각의 산파 노릇을 함으로 자아인식의 범위를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상대는 “A”를 모른다고 생각했는 데 실상은 “B”를 몰랐던 것이고, “B”의 답을 찾다가 더 중요한 “C”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전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C, 즉 나의 잠재력과 가능성이 조하리 창의 네 번째 영역에 숨겨져 있다. 이 영역은 보물이 숨어있는 뒷동산이며 내가 자신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탐구해야 할 대상이다.
조하리 창은 한 개인의 자아 개방과 타인이 피드백해 주는 것의 중요성을 잘 묘사한다. 그러나 이 모델에는 타인이 나의 외현적 행동(overt behaviors)은 관찰 가능하나 내현적 행동(covert behaviors), 즉 행동화되지 않은 생각이나 의도를 알기 어렵다는 점에 대한 고려는 없다. 내 마음의 창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사람의 피드백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그의 피드백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업에서 한 개인의 역량이나 행동을 판단하기 위해 적용하는 360도 피드백 시스템의 제약도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한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피드백해 줄 수 있는가? 그런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내면의 특성을 관찰하는 도구로 성격특성 검사를 사용한다. 남이 아닌 본인이 응답한 설문이나 검사의 결과이니 고객은 그 결과를 쉽게 받아들인다. 남을 코칭이나 상담으로 돕는 사람은 이런 객관적 잣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훈련받아야 한다. 수술 도구를 오용하거나 진단이나 평가 결과를 잘못 해석하면 상대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런 고도로 훈련받은 기법을 적용하기 전에 돕는 사람이 먼저 자기 개방을 하면
상대는 방어기제에서 벗어나 조금씩 자기를 열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