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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지교와 지란지교

by 양목수

관포지교(管鮑之交)는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인물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사귐을 뜻한다. 포숙은 관중의 지혜로움을 알아보고 자본을 대고 관중이 사업을 경영하도록 했다. 사업이 성공하자 관중은 이익금을 혼자 독차지하였다. 그런데도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했다. 함께 전쟁에 나아갔으나 세 번이나 도망 간 관중을 포숙은 비겁자라 비난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를 감쌌다.


포숙은 제나라의 둘째 공자 소백을 섬기고 관중은 소백의 형 규를 섬겼다. 권력 상속 쟁탈전에서 동생 소백이 형 규를 죽이고 그 아버지에 이어 환공이 되었다. 포숙이 체포된 관중을 보호하고 밀어주어 관중은 제나라 재상이 될 수 있었다. 포숙은 관중 밑에 들어가서 일하기까지 했다. 국정을 잘 다스리는 관중에 힘입어 환공은 패자의 지위에 이르고 제후들과 화합하여 평화적으로 천하를 평정했다.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용은 경세가인 관중의 사상을 체계화한 책, “관자”의 첫 편에서 ‘목민’의 개념을 따와 목민심서에 적용했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경영 능력보다 친구에게서 허물보다 능력을 보고 그를 도운 포숙을 더 칭송한다. 관중은 ‘나를 낳으신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이는 포숙’이라고 고백했다.


유안진은 “관포지교”보다는 이른바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었다. 그녀의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

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우정을 나누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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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이라 함은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들려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게다. 나 또한 그의 눈에 눈곱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 해도 그의 숙녀 됨이나 신사 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말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 지리라." (지란지교를 꿈꾸며, 78~79쪽, 정민미디어).


지란지교는 명심보감, 교우 편에 나오는 말로 ‘벗 사이의 고상한 교제’를 말한다. 공자는 "선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향기로운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안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그 냄새를 맡지 못하니, 이는 곧 향기와 더불어 동화된 것"이라는 말했다. 친구는 그와 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이라 가르쳤다. 지초는 있는 그대로 지초의 향내를 내고, 난초는 달리 꾸미지 않아도 난초의 자태를 보인다. 친구 앞에서 허물과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다움을 나타내며 서로 인정하는, 그래서 누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더라도 다시 만날 때까지 보고 싶어 지는 관계, 지란지교는 그런 사귐이다. 이 사귐을 유안진은 “문병 가서”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나직하게 말한다.


밤비에 씻긴 눈에
새벽별로 뜨지 말고
천둥번개 울고 간 기슭에
산나리 꽃대궁으로 고개 숙여 피지도 말고

꽃도 별도 아닌 이대로가 좋아요

이 모양 초라한 대로 우리
이 세상에서 자주 만나요
앓는 것도 자랑거리 삼아
나이만큼씩 늙어가자요.


관포지교와 유안진의 지란지교는 남녀 간 관계 형성 방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남자들은 일이나 운동 같은 것을 매개하여 관계를 맺는다. 그 관계는 경쟁하면서도 협력하며 발전한다. 포숙은 관중의 탁월한 역량과 잠재력을 보았고, 그것들을 사업과 나랏일에 발휘하도록 협력했다. 남자들은 군대 시절 동료들과 함께 했던 일들을 생각날 때마다 말한다. 그럼에도 제대 후에 그런 동료들이 그리워서 찾아 나서는 남자들은 의외로 적다. 성인발달 학자들의 관찰에 의하면,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대체로 폭넓은 대인관계를 유지하지만, 깊은 친밀관계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많이 경험한다. 남자들은 무엇을 하면서 관계를 확인하나 여자는 서로 대화하며 공감함으로 친밀해진다.


‘이성 간에 우정이 가능하냐’ 식의 주제는 제법 논란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 젊은 세대에는 그런 것 같지 않다. 동남아 일부 해안 지방을 강타한 쓰나미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을 때 대학생이던 아들 녀석은 방학을 맞아 동남아 배낭여행을 떠난 그의 친구를 크게 걱정했었다. 그러다 그 친구로부터 ‘쓰나미가 오기 며칠 전에 인도로 와 있으니 걱정 말라’는 이메일을 받고 아이는 안도했다.

“혼자서 여러 나라를 배낭만 지고 여행을 가다니, 그 녀석 용기가 대단하다. 그놈은 군대 언제 간다더냐?”

내 말을 들은 아들놈은 도대체 말이 안 통한다는 표정으로 ‘예? 걔는 남자가 아닌데요. 여자가 무슨 군대를 가요?’ 하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종종 아들은 ‘후배 소개로 좋은 그림 선생을 찾았다’든가’ 혹은 ‘요리를 끝내 주게 하는 친구가 곰탕을 끓여 주어 맛있게 먹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 친구 혹은 그 후배가 남자려니 생각했는 데 알고 보면 여자였고, 여자려니 짐작했는데 남자일 경우가 더러 있었다. 아들은 내가 우정의 대상에 관해 남녀 성별 구분에 얽매여 있는 것으로 단정했다. 사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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