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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정신과 문 앞에서 망설였을까

마음의 고통을 대하는 사회의 이중잣대

by 기록습관쟁이

인생은 거대한 강물과 같다. 때로는 잔잔한 햇살 아래 평화롭게 흐르지만, 때로는 거친 소용돌이와 예측 불가능한 급류를 만나기도 한다. 인간은 그 강물 위에서 각자의 배를 타고 항해한다. 배에 실린 짐은 기쁨과 사랑, 성공이라는 아름다운 추억들이지만, 동시에 슬픔, 상실, 실패라는 무거운 돌덩이이기도 하다. 모두가 예외 없이 거친 파도에 휩쓸리고, 배에는 크고 작은 균열이 남는다. 결국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서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선택(Choice)뿐이라는 말처럼, 균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항해를 계속할지 결정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얼마 전, 생에 처음으로 정신의학과의 문을 열었다. 몸이 아플 땐 병원에 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위가 아프면 내과를, 뼈가 부러지면 정형외과를 주저 없이 찾는다. 하지만 마음이 아플 때는 달랐다. 이상하게도 그 문턱 앞에서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현관문 앞에서 서성이는 아이처럼,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알려져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지 않을까, '의지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거미줄처럼 나를 옥죄었다. 그 문은 단순한 병원의 문이 아니라, 내가 사회 속에서 쌓아온 가면을 벗어던지고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야 하는 용기의 문처럼 느껴졌다.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의 병에 대해 만들어 온 이중잣대다. 몸의 병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치료 대상이지만, 마음의 병은 개인의 실패나 부끄러운 비밀처럼 감추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된다. 우리는 마음의 아픔을 숨기기 위해 더 밝게 웃고, 더 씩씩하게 행동하는 가면을 쓴다.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가장 두꺼운 침묵의 벽이 우리를 가로막는 아이러니가 반복되는 거다. 이 벽은 어디서 왔을까? 아마도 우리는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왜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하냐'는 무언의 질책을 던져왔기 때문일 거다. 아픔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삶의 고투'라는 당연한 결과를 왜 우리는 외면해 왔는가.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마음의 고통은 단순한 병리적 현상이나 결핍은 아니다.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조건이자,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실존 징표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간을 <절망하는 존재>라 규정했다. 그에게 절망은 단순히 피해야 할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절망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과 대면하려는 치열한 노력의 흔적인 거다. 그 균열을 통해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니체 또한 고통의 의미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그의 유명한 말인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단순히 고통을 미화하는 허울 좋은 구호가 아니다. 그에게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허무주의를 이겨내고 삶의 의미를 창조하는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는 운명에 대한 사랑, 즉 <아모르파티>를 강조했다. 삶의 아름다운 부분뿐만 아니라, 고통과 슬픔까지도 온전히 끌어안는 태도다. 마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삶 전체를 긍정하는 힘을 얻게 되는 거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 강제수용소라는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인간이 끝가지 붙들어야 할 건 <의미>라고 말했다. 그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왜 나는 살아남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으려 했다. 그에게 고통은 파괴가 아니라,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가는 통로였다. 마음의 병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걸 인정하고 직면할 때, 고통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묻는 근원적인 질문이 된다. '나는 이 아픔을 통해 무얼 얻을 수 있는가?', '나는 이 아픔을 어떻게 내 삶의 일부로 통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린 존재의 무게를 견딜 힘을 얻게 된다.


결국 정신적 고통을 숨기려는 태도는, 인간으로서의 근원적 조건을 부정하는 셈이다. 몸의 병이 치유를 통해 생명을 연장한다면, 마음의 병은 치유를 통해 존재의 무게를 견디고 더 깊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고통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인간이 세상과 부딪히며 치열하게 살아간 흔적이다.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은 분명하다. 아픈 마음을 낙인으로 여기는 사회적 시선을 거두어 내는 것. 몸의 병처럼 마음의 병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저 없이 요청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 우리 마음은 투명하지 않기에, 더더욱 그 아픔에 귀 기울여야 한다.


결국 B와 D 사이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C는 단순한 치료의 선택을 넘어선다.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의미를 찾는 용기 있는 태도. 그때 비로소 아픈 마음은 감춰야 할 낙인이 아니라, 성찰과 성숙의 문이 될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나가는 모든 발걸음은,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고귀한 증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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