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야구의 열병 : 몰입, 허무, 그리고 회복의 기록

KBO 포스트시즌이 앗아간 삼 주간의 광기

by 기록습관쟁이

지난 삼 주 동안, 제 일상은 '9회 말 투아웃'의 긴장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응원하던 팀이 기적처럼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서부터였죠. 마치 제 삶이 그라운드 위로 이식된 듯했습니다. 출근길엔 전날 경기 하이라이트를 돌려보고, 퇴근길엔 오늘의 선발 라인업을 확인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자연스레 TV 앞에 앉아, 손에 땀을 쥔 채 볼 카운트를 세고 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야구에 홀린 나날이었습니다.

현장에 가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집 거실은 그 어떤 구장보다 뜨거웠습니다. 응원 타올을 손에 쥐고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삼진 한 번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한 방의 홈런에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호했습니다. 제 감정은 선수들의 투구만큼이나 널뛰었습니다.

옆자리의 아내는 그 모든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는 '냉정한 심판'이자 '은밀한 조력자'였습니다. 한 손으로 맥주캔을 건네고, 다른 손으로 혀를 끌끌 찼죠.

"오빠, 오늘도 목소리가 나가겠네. 내일 일찍 나가야 하는 거 알지?"

그 말에는 포기와 체념, 그리고 묘한 연민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매번 안주를 챙겨주는 걸 보면, 어쩌면 제 열정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야구에 전혀 관심 없던 아들도 처음엔 무심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제 환호성이 너무 커서였을까요. 방문이 살짝 열리더니 얼굴을 내밀고 물었습니다.

"아빠, 이겼어?"

"응! 역전했어! 우리 팀이 최고야!"

그렇게 외치는 제 모습을 보고, 아들은 잠시 웃더니 다시 방문을 닫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약간의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내 열정이 가족의 관심을 얻지 못한 고립된 섬 같았거든요.


그 미쳐 있던 시간 동안, 저는 작가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펜을 내려놓았습니다. 평소라면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쓰고, 카메라를 들고 사진이라도 찍었을 텐데, 그 모든 루틴이 무너졌습니다. 책상 위엔 원고 대신 경기 일정표가 놓여 있었고, 손끝은 키보드 대신 리모컨을 쥐고 있었습니다. 옆에 펼쳐둔 책은 하루 한 문장도 겨우 읽을 뿐. 본업과 부업, 그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제 의식은 9회 말 투아웃의 긴장감에만 매달려 있었죠.

그런 몰입의 시간이 끝난 건 너무도 갑작스러웠습니다. 응원하던 팀이 결승에서 아쉽게 패하면서였습니다.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잡히는 순간, TV 속 선수들이 머리를 숙였고, 저 역시 화면 앞에서 고개를 떨궜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멍한 상태로 출근을 반복했고, 텔레비전이 꺼진 거실엔 이상할 만큼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현실을 등한시했는지를요. 내 삶의 리듬은 야구의 이닝처럼 나뉘어 있었고, 승패에 따라 하루의 기분이 결정되었습니다. 회사 일도, 글쓰기의 영감도, 가족과의 대화도 모두 '경기 결과'의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포츠란 본래 이런 속성을 가진 존재가 아닐까?

선수들이 흘린 피와 땀이 승리라는 극적인 보상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에 중독됩니다. 그 짜릿한 기쁨은 도파민이 되어 우리를 잠 못 들게 하고, 반대로 패배의 순간엔 가슴을 치며 절망합니다. 그 희로애락의 진폭이야말로, 우리가 선수들과 함께 '인생의 한 장면'을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


야구는 사실 '인생의 축소판'이라 불립니다. 실책이 있고, 역전이 있으며, 때로는 비 오는 날 경기가 취소되기도 합니다. 완벽한 하루란 없고, 언제나 변수와 예외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결국엔 시즌이 끝나고, 선수들은 다시 봄을 준비합니다. 패배에 주저하지 않고, 묵묵히 몸을 만들고, 다음 경기를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태도는 삶이 태도와 닮아 있습니다.

저 역시 이제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길고 뜨거웠던 가을 야구의 열병은 막을 내렸고, 일상의 루틴이 다시 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커서를 깜빡이며, 다시 한 문장을 써 내려갑니다. 쓰는 일이란 결국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훈련' 같은 것 아닐까요. 한동안 방치된 제 감정과 생각을 다듬고, 다시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야구가 제게 준 것은 단순한 열광이 아닙니다. 그것은 몰입의 힘이었습니다. 그 몰입이 비록 일시적 광기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인간이 무언가에 전심으로 빠져드는 순간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몰입 뒤에 찾아오는 허무와 회복, 그 둘 다 결국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시즌이 끝나고 나면 그라운드는 텅 비고, 조명은 꺼집니다. 하지만 선수들은 다시 훈련을 시작하고, 팬들은 다시 봄을 기다립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죠. 열정의 계절이 지나면, 조용한 성찰의 겨울이 찾아옵니다. 그 시간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짜 경기일지도 모릅니다.


야구는 끝났지만, 인생의 경기는 여전히 이어집니다. 내년 봄, 다시 시작된 그 열병을 기다리며 저는 오늘도 제 일상의 마운드로 천천히 복귀합니다.

글을 쓰고, 커피를 내리고, 가족과 대화를 나누며, 제 안의 '시즌'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저녁 하늘에 응원의 함성이 울려 퍼질 때, 저는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제 나의 시즌도, 다시 시작이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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