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통도 치통도 아닌, 글통

당신도 글통을 앓고 있나요?

by 기록습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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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참 별의별 병을 다 앓는다지만, 요즘 제가 앓고 있는 병은 좀 특이합니다. 의학사전에도 없고 보험 청구도 안 되는 희귀병, 이름하여 '글통'입니다. 두통엔 타이레놀이 있고 치통엔 치과가 있다지만, 이 글통은 답도 없습니다. 유일한 처방약은 노트북 앞에 앉아 흰 화면을 마주하는 것뿐이죠. 그런데 이게 참 웃깁니다. 약을 먹으러(글을 쓰러) 가는 길이 세상에서 제일 싫거든요.


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주 우아합니다. 마치 어느 고즈넉한 숲 속의 시인처럼,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유유자적 펜을 휘두르는 모습이죠. 일상이 곧 글이 되고,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문장이 쏟아지는 그런 경지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냐고요? 현실의 저는 노트북 전원을 켜는 순간부터 "아, 하기 싫다"를 속사포로 내뱉는 평범한 인간일 뿐입니다.


한 유명 개그맨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성공하려면 하기 싫은 걸 해야 해. 근데 하기 싫은 걸 하려면 그걸 좋아해야 하지. 결국은 그냥 해야 하는 거야."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습니다. 아니, 사실은 뼈를 세게 맞아서 얼얼할 정도였죠. 가만 생각해 보니 제가 글을 대하는 태도가 딱 그랬거든요. 글쓰기란 녀석은 참 고약합니다. 자리에 앉기까지는 온갖 변명을 다 늘어놓게 만듭니다.

"커피 한 잔만 더 마시고"

"책상 정리 좀 하고"

"아, 뉴스에 뭐 떴지?" 하며 딴짓의 끝판왕을 달립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억지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마치 고문당하는 사람처럼 키보드를 하나씩 두드리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이상한 기류가 흐릅니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머릿속에 있던 파편들이 화면 위로 쏟아질 때의 그 쾌감! 엔도르핀이 솟구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그 찰나의 순간 말입니다. 저는 사실 이 변태 같은 순간을 사랑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무의식의 흐름을 타고 써 내려간 초고를 다 쓰고 나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작가가 됩니다. 적어도 다시 읽어보기 전까지는요.


하지만 다시 읽는 순간, 현실 자각 타임이 옵니다.

"세상에, 이게 사람이 쓴 글인가? 아니면 외계인이 암호를 남긴 건가?" 싶을 정도로 글은 엉망진창입니다. 문법은 파괴되어 있고, 앞뒤 문맥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립니다. 아주 제멋대로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 엉망인 글을 보며 저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집니다. 왜냐고요? 이 글은 완벽주의라는 아주 까칠하고 무서운 검열관을 따돌리고 얻어낸 전리품이거든요. 내 안의 목소리가 필터링 없이, 날것 그대로 터져 나왔다는 증거니까요. 예쁘게 다듬어지진 않았지만, 나를 온전히 쏟아냈다는 그 해방감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짜릿한 중독입니다.




저는 이 고통스러운 즐거움을 글통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헬스장에서 근육을 찢으며 운동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근육통이 "너 오늘 운동 제대로 했어!"라고 말해주는 훈장 같은 것처럼, 글을 쓰며 느끼는 이 통증도 "너 지금 제대로 성장하고 있어!"라는 신호 아닐까요?


아직은 적응기라 좀 아픕니다. 치통처럼 욱신거릴 때도 있고, 두통처럼 머리가 지끈거릴 때도 있죠. 하지만 이 즐거운 조각들이 하나둘 모이다 보면, 언젠가는 그 고통의 시간들을 서서히 밀어내리라 믿습니다. 그때가 되면 제가 꿈꾸던 그 유유자적한 시인처럼, 숨 쉬듯 자연스럽게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겠죠.




결국 결론은 하나로 수렴합니다.


"그냥 하는 것."


구구절절 이유를 찾을 필요도, 화려한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글이 잘 써지는 날이든, 한 줄도 안 나가는 날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냥 노트북을 펼치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겁니다. 꾸준하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요.


누군가 제게 "왜 그렇게 힘들게 글을 써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제 웃으며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기 싫어서요. 근데 너무 좋아해서요. 그래서 그냥 씁니다."


오늘도 저는 엉망진창인 초고를 한 페이지 채웠습니다. 문장은 비록 제멋대로지만, 제 마음만큼은 아주 상쾌합니다. 펜 끝에서 그려질 내일의 풍경이 벌써부터 기대되거든요.


여러분도 혹시 글통을 앓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환영합니다. 우리는 지금 아주 건강하게 잘 가고 있는 거니까요!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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