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품고 시작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처음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자리를 이끌어야지, 자리가 사람을 바꾼다는 건 책임 회피처럼 느껴졌다. 대기업 사무직으로 입사했던 그는 '합리적이고 주도적인 일처리'를 꿈꿨다. 일 잘하면 인정받고, 성과로 승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1년, 2년, 시간이 지나며 그 환상은 무너졌다. 회의에서는 다들 눈치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실제로 일하는 건 실무자들인데, 결정권은 위에만 있었다. 그는 처음엔 문제를 지적했다. 자료에 오류가 있다며 팀장에게 수정 필요성을 말했고, 무의미한 야근 문화에 대해 건의도 했다.
"넌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적당히 하자. 사회생활이잖아."
그 뒤로 그는, 입을 닫았다. 문제가 보여도, 그냥 모른 척했다. 회의에서도, 단톡방에서도 묻힌 사람이 되었다. 그게 더 편했고, 더 안전했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던 '평범한 대리'가 되어 있었다.
공무원 박 주무관 역시 마찬가지다. 공익과 정의를 꿈꾸며 행정고시에 도전했고, 지방청에서 첫 발령을 받았을 땐 의욕에 차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민원인에게 욕을 먹어도 죄송하다고 하고,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왜 그렇게 해야 하죠?"
라는 질문 하나에 선배가 조용히 말해줬다.
"그런 말 하면 너만 피곤해져."
그날 이후 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문서를 복붙 하고, 결재라인을 타고, 정시 퇴근과 연가를 챙기는 게 유일한 낙이 됐다. 꿈은 살아 있지만, 현실은 그냥 숨 쉬는 직장인일 뿐이다.
중소기업 마케팅팀 이 대리는 더 극적이다. 아이디어가 많았고, 성과도 꽤 냈다. 하지만 팀장은 늘
"괜히 튀지 마, 위에서 싫어해"
라고 했다. 보고서에 팀장의 이름을 먼저 써야 했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팀장은 옆에서 그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는 분노했지만, 몇 번 부딪히고 나니 체념하게 됐다. 이젠 누구보다 '위에 잘 보이는 방법'을 안다.
'보고서에 누구 이름을 먼저 써야 하는지', '점심은 누가 먼저 먹자고 해야 자연스러운지' 이 모든 걸 익힌 뒤, 승진도 앞당겨졌다.
요즘 그는 자주 생각한다.
"내가 이걸 원했나?"
"지금 내가 잘하는 게, 회사생활이지 마케팅인가...?"
그렇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건,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무수한 선택의 결과다. 분노, 체념, 타협, 적응. 그 과정에서 조금씩 스스로를 깎아낸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깨닫는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지만, 예전의 나는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깨달음이 다시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점이다.
"이 자리가 나를 바꾸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자리를 어떻게 견디는지가 나를 만든다."
이걸 안 순간부터, 누군가는 조금씩 중심을 되찾기 시작한다.
다시 질문하고,
다시 소신을 말하며,
비록 불편하더라도 나를 지키는 쪽을 택하려 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 수도 있다. 그 말은 맞다.
하지만 그 자리에 어떤 태도로 앉아 있는가는, 여전히 각자의 몫이다.
만약 그 자리가 나를 계속해서 무디게 만들고, 내 소신과 열정을 깎아내린다면...
그 자리를 버리는 용기도 필요하다.
모든 자리가 나와 맞을 수는 없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자리라면 다른 자리를 찾는 게 맞다.
그건 도망이 아니라,
다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