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경우의 수 10화

9화. 은퇴

끝은 우리를 무너지게 하지 않는다.

by 기록습관쟁이

'이 길도, 언젠가는 내 것이 아니겠지'


출근길, 버스 창밖에 스치는 가로수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매일 지나치던 길,

언제까지고 내 것일 것 같던 풍경.

그게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진 않을까.


나는 괜히 창문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너머로, 바람이 스쳤다.


아버지의 정년 마지막 날.

기차역으로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


멀리서 걸어오는 아버지는

늘 그랬던 것처럼 무심했다.

작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나는 가슴이 울컥했지만,

입술을 꾹 다물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보냈던 단 한 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낡은 웃음으로 말했다.


"홀로 울산에서 보낸 시간들은...

서랍 속 사진 한 장처럼 남을 거 같다."


그 말에, 나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괜찮다고, 충분했다고,

겨우 속으로만 말했다.


며칠 후, 은퇴한 선배를 만났다.

"은퇴? 난 '졸업'이라 불러."

그가 말했다.

텅 빈 커피잔을 앞에 두고.


"회사라는 학교를 졸업하는 거야.

선생님이 필요 없을 만큼,

이제 세상에 나가서 내 식으로 살아도 된다는 거지."


그가 웃을 때,

그 웃음 너머로 수십 년 쌓였던 시간들이 보였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오랫동안 생각했다.

'나는 어떤 은퇴를 하고 싶을까.'


예전의 나는 은퇴를 '끝'이라고만 생각했다.

퇴장, 마감, 손을 놓는 일.

하지만 지금은 안다.


은퇴란,

삶이라는 긴 책의 다음 장을 여는 일이라고.


100세 시대.

우리에겐 여전히,

수십 년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누구는 퇴직 후 작은 카페를 열었다.

아침마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코코아를 건넨다.

"이 작은 잔에, 내가 줄 수 있는 다정함이지 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누구는 손주들과 텃밭을 가꾼다.

흙 묻은 손으로 방울토마토를 따며 웃는다.

"이 맛을 알아야 인생을 안다니까."

그는 흙먼지 속에서 소리쳤다.


또 다른 이는, 여행 가이드가 되었다.

평생 품었던 꿈 하나,

뒤늦게라도 꺼내 들었다.

"늦은 게 아냐.

이제야 진짜 내 인생을 걸어가는 거지."


그리고 어떤 이는, 조용히 글을 쓴다.

하루 한 줄,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나를 잊지 않기 위해 쓴다."


어쩌면 은퇴란,

새로운 직업을 찾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손을 놓는 게 아니라,

다시 손을 뻗는 것.


끝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다음을 기다리는 것.


혹시 지금,

어떤 끝 앞에 서 있는 당신이 있다면.

조급해하지 말길.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그 순간,

우린 이미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을 테니까.


나는 오늘,

이제야 조금 느슨한 숨을 쉬며,

내일을 향해 걸어간다.


이번엔,

조금 더 내 마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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