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우리를 무너지게 하지 않는다.
'이 길도, 언젠가는 내 것이 아니겠지'
출근길, 버스 창밖에 스치는 가로수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매일 지나치던 길,
언제까지고 내 것일 것 같던 풍경.
그게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진 않을까.
나는 괜히 창문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너머로, 바람이 스쳤다.
아버지의 정년 마지막 날.
기차역으로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
멀리서 걸어오는 아버지는
늘 그랬던 것처럼 무심했다.
작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나는 가슴이 울컥했지만,
입술을 꾹 다물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보냈던 단 한 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낡은 웃음으로 말했다.
"홀로 울산에서 보낸 시간들은...
서랍 속 사진 한 장처럼 남을 거 같다."
그 말에, 나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괜찮다고, 충분했다고,
겨우 속으로만 말했다.
며칠 후, 은퇴한 선배를 만났다.
"은퇴? 난 '졸업'이라 불러."
그가 말했다.
텅 빈 커피잔을 앞에 두고.
"회사라는 학교를 졸업하는 거야.
선생님이 필요 없을 만큼,
이제 세상에 나가서 내 식으로 살아도 된다는 거지."
그가 웃을 때,
그 웃음 너머로 수십 년 쌓였던 시간들이 보였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오랫동안 생각했다.
'나는 어떤 은퇴를 하고 싶을까.'
예전의 나는 은퇴를 '끝'이라고만 생각했다.
퇴장, 마감, 손을 놓는 일.
하지만 지금은 안다.
은퇴란,
삶이라는 긴 책의 다음 장을 여는 일이라고.
100세 시대.
우리에겐 여전히,
수십 년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누구는 퇴직 후 작은 카페를 열었다.
아침마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코코아를 건넨다.
"이 작은 잔에, 내가 줄 수 있는 다정함이지 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누구는 손주들과 텃밭을 가꾼다.
흙 묻은 손으로 방울토마토를 따며 웃는다.
"이 맛을 알아야 인생을 안다니까."
그는 흙먼지 속에서 소리쳤다.
또 다른 이는, 여행 가이드가 되었다.
평생 품었던 꿈 하나,
뒤늦게라도 꺼내 들었다.
"늦은 게 아냐.
이제야 진짜 내 인생을 걸어가는 거지."
그리고 어떤 이는, 조용히 글을 쓴다.
하루 한 줄,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나를 잊지 않기 위해 쓴다."
어쩌면 은퇴란,
새로운 직업을 찾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손을 놓는 게 아니라,
다시 손을 뻗는 것.
끝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다음을 기다리는 것.
혹시 지금,
어떤 끝 앞에 서 있는 당신이 있다면.
조급해하지 말길.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그 순간,
우린 이미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을 테니까.
나는 오늘,
이제야 조금 느슨한 숨을 쉬며,
내일을 향해 걸어간다.
이번엔,
조금 더 내 마음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