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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우 Jul 16. 2020

[토니 타키타니] 소설과 영화

지켜가는 행복과 채워가는 행복

지켜가는 행복과 채워가는 행복 

[토니 타키타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과 이치카와 준의 영화

 한국과 일본의 문학은 의외로 형식에 대한 관습적 버릇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 출판사나 신문사 등을 통한 등단이란 제도가 있는데 그것은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과 일본에만 있는 제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분량에 대한 것으로 단편과 장편 또는 대하소설의 길이에 대한 원고지 매수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전통적이고 무의미한 출판 프로세스의 편의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그 때문에 분량을 맞추려고 억지로 내용을 축약하거나 혹은 필요 이상의 서사가 확장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토니 타키타니>를 읽으면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를 보면 그것을 확신하게 된다. 필요 이상의 서술이 무의미하거나 핵심을 벗어날 수 있는 장식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낀 일본의 나오키상 계열의 대중소설들 에서는 그것이 공통적이었다. 특히 불필요하게 긴 상황 설명이라든가 무의미한 대화의 나열은 원고지 분량을 맞추기 위한 의미 없는 적재물 같았다. 

 하루키의 원작을 각색한 이치카와 준 감독의 동명 영화 <토니 타키타니>를 보면 그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필요 없는 장식의 적재물들을 치워버림으로써 오히려 원작보다 더 선명한 본질의 색을 찾았다. 소설과 영화는 같을 수 없으며 달라야 바르다. 영화가 소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고 하는 것은 본질적인 모순이다. 문장만의 맛을 영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영상의 멋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두 분야를 하나로 묶어 놓았을 때 거기에는 전혀 다른 제3의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소설과 영화, 그 어떤 것을 먼저 읽거나 봐도 서로 포함되거나 포함시키지 않는 고유하고 독립적인 작품이다. 어쩌면 가장 원작에 충실한 영화라는 것의 모범 같았다.

 영화는 먼저 지우는 작업부터 한다, 지운 다기보다는 소설을 영화의 언어에 맞게 과감히 다듬는 작업이다. 거기서 불필요한 많은 부분이 삭제되고 필요한 부분은 증폭된다. 또한 진행의 순서도 원작과 차이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일반적이고 지루할 수 있는 전개 방식에 새로움을 주는 동시에 각 시점의 사건을 강하게 인식시켜주는데 효과적이다. 또한 문학적인 문장의 맛을 버리지 않기 위해 자주 내레이션을 사용하는데 내레이션의 마지막은 배우가 연기 상황과는 맞지 않게 연기 중에 내레이션을 받아서 말하는데. 매우 신선한 전개 기법의 하나였다. 

 카메라는 마치 흘러가는 시간을 암시하듯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줄곧 무빙 하는데 그것은 마치 연극의 무대 배경이 시간에 따라 바뀌는 것 같은 느낌으로 독창적이다. 그리고 영화 전반의 무채색에 가까운 컬러는 영화를 현실적 사건보다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기존 대중영화의 습관에서 벗어나려는 이러한 모험적인 시도들은 결국 감독의 뜻대로 맞아떨어졌다.

이제 소설의 내용에 대해 살펴본다.

토니 타키타니라는 주인공은 기회주의자이면서도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는 재즈 트롬본 연주자의 아들로 일찍 죽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즉 자상함과 따뜻한 감성을 경험하지 않는 남자다. 그래서일까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것이 나중에 직업이 되는데 그의 그림은 친구들의 말처럼 감성이란 것이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다소 어두운 가족환경에서 그저 묵묵히 무언가에 집중하는 수단으로써의 그림일 뿐 그림으로 자신의 내면을 표출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일도 없다. 그에게는 희망이나 환상 같은 것은 불필요하며 그것들은 상처를 만들 뿐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기대지 않고 오직 현실의 시간을 묵묵히 상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목표인 기계적인 인간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복잡한 기계나 장치 같은 것을 오직 사실적으로 꼼꼼히 그리면 되는 정밀묘사 일러스트였다. 마치 오타쿠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 같았다. 

그런 아무도 그리고 싶지 않은 지루한 일러스트는 그 희소성 때문인지 그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하고 부도 축적하게 된다. 그러한데도 그는 여전히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것을 멀리하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거래처의 15살 연하의 처녀에게 난생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되고 5번 만난 후에 고백하였으며 곧바로 결혼하게 된다. 그가 그녀에게 반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옷을 매우 세련되게 입고 다니는 센스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으로 변화와 그리고 희망을 만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히사코이다. 그녀는 선천적인 것처럼 변화와 희망을 행복으로 추구하는 여자였다. 그녀가 그와 결혼하게 된 이유도 어떤 아련한 희망 때문이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었지만 그녀의 희망에 도움을 주기에는 무능력한 동갑의 남자 친구였다. 그에 비해서 연령차가 많은 토니는 그녀에게 늘 변화에 대한 동경을 실현시켜 줄 만한 능력 혹은 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사코의 변화에 대한 수단은 그 무엇도 아닌 옷을 사는 것이다. 늘 새로운 옷을 사고, 그것을 입고, 달라지는 자신에게서 행복을 느꼈다. 그러므로 그녀의 옷 쇼핑은 꿈과 행복을 실현하는 수단이다. 그 후로부터 그녀는 매일 끊임없이 명품의 옷과 구두, 가방을 사댔으며 그 일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가속되어갔다. 심지어 토니와 유럽여행을 할 때도 오직 명품 브랜드숍에서 쇼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토니는 애초부터 쇼핑이란 것과 거리가 먼 인간이었으므로 많은 수입에도 지출이 거의 없어  빠르게 재산을 축적했다.  때문에 아내의 엄청난 쇼핑에 대해서도 돈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없었던 변화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 아내를 보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없었던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집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는 아내의 옷방을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엔 자신의 상상을 넘어선 엄청난 양의 옷들과 가방, 구두, 모자, 액세서리들이 있었고, 그 규모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녀가 한두 번 만 입었거나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도 상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그것이 아내의 어떤 비정상적인 집착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어느 날 아내에게 그것에 대해 넌지시 조심스럽게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히사코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그녀도 곧 진심으로 수긍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도 스스로의 병적인 과함을 자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노력에 하나로서 얼마 전 구입하였지만 앞으로 입을 가능성이 없는 옷 몇 벌을 반품하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단골 숍에서 어색한 반품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신호 위반 트럭과 충돌하여 즉사한다. 천천히 만들어지는 행복에 비해 불행은 이토록 잔인하도록 순식간에 덮치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멀어지는 행복을 모른 체하고 더해지는 행복조차 과다한 욕심처럼 자재하면서 까지 지켜온 가느다란 행복을 일관되고 천천히 유지해온 토니에게 이 사건은 원폭처럼 느닷없는 엄청난 인생의 사건이었다. 

몇 달간 침묵하며 몸을 사려온 그는 어느 날 문득 그 상실을 만회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방법으로서 그는 아내와 똑같은 신체사이즈를 가진 여성 직원을 들여서 매일 아내의 옷을 입고 주변에서 일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상실에 대한 어이없는 출구였다.

그리고 결국 수십 대 일의 경쟁을 통해 아내와 거의 비슷한 여직원을 면접으로 뽑는다. 그러나 그는 일주일도 되기 전에 그런 자신의 계획의 허무함을 느끼고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아내의 옷들과 아버지가 남긴 레코드 등의 유품도 모두 업자에게 싸게 팔아버린다,

텅 빈 아내의 옷방에서 그가 혼자 앉아 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다.


 토니는 더도 덜도 없이 겨우 가느다란 행복을 이어왔지만 그것은 늘 가슴 졸이는 불안한 것이었고 결국 작은 변화에 끊어져 버렸다. 

 히사코는 늘 담고 또 담으며 빈 그릇을 채우려 했지만 소화되지 않고 넘쳐흘러 떨어져 버릴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행복의 영양실조로 굶어 죽은 것이다.


두 사람의 불행한 공통점은 행복을 자체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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