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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우 Apr 26. 2022

한 봄밤의 사건


한 봄밤의 사건     


그 저녁 다이소에서 사과를 자르는 가구의 완벽함에 감동하여 그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단 한 번의 터치로 사과를 수학적으로 정확히 여덟 조각으로 분배하여 자르면서 동시에 씨 부분을 원통으로 분리하는 놀라운 이 기구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평등에 대한 진리의 척도이며 공평한 나눔의 궁극의 미를 재현할 수 있는 이 기구는 불완전한 인간의 어설픈 손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완벽한 작업을 무려 단 한 번의 터치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훌륭한 기구를 계산하면서 터무니없는 싼 가격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옆 마트에서는 평소 눈길도 안 주던 사과들을 잔뜩 사버렸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던가. 이 차가 이렇게 느렸던가. 백미러에 비친 내 얼굴은 지루함과 초조함이 뒤엉켜 전혀 낯선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식탁의 하찮은 잡동사니들을 단번에 바닥으로 쓸어 내던진 후 조심스레 기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완전한 평등을 재현하기 위해  사과를 올려놓았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 했다.

생애 처음으로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의 초조함, 그리고 생애 처음 판결을 하는 판사의 긴장된 마음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용기를 내어 올려놓은 사과를 자르려고 하자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건 아닌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럴 수는 없어'...

결과는 아름답기는커녕 괴상망측한 모양이었고 정확한 분배도 안되었다. 다른 사과들도 마찬가지 결과였다.

한동안 내 행동은 정지화면처럼 굳어있었고 그 사이에 머릿 털 속에서는 땀이 솟아나고 있었다.

마음을 평정시킨 후 문제의 원인을 다각적으로 찾아보고 해결점을 찾으려 했으나 결론은 그것의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혼자이면서도 더욱 혼자 있고 싶어졌다.     

한 시간 후 나는 정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의 총체적인 문제는 기구가 아니라 사과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기구는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모양이었지만 사과들의 모양이 제각각이었던 것이다.

즉 사과의 상하 축이 정확히 수직이 아니었으며 축을 중심으로 과육이 각 방향마다 모두 다른 양으로 배분돼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 불규칙함에 분노가 밀려왔고 나를 배반한 제각각 모양의 사과들을 저주하고 싶어졌다.

왜 죄다 이 모양인가. 이따위 모양들이면서 도대체 어떤 평등한 분배를 희망한다는 것인가.

못생긴 사과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폐기하였고 나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통곡하며 잠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목마름에 잠이 깼다. 그리고 문득 단 것이 입에 당겼는데 그것은 주변에서 상큼하고 달콤한 향기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향기가 나오는 곳은 쓰레기통이 아닌가. 허탈하면서도 신경이 쓰인다.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향긋하고 신선한 음식은 없고 모두 오래된 가공식품뿐이었다.

내 손은 끝내 쓰레기통을 열어보았다. 아까 버린 사과들 뿐이었는데 그중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세 개의 사과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어느새 내 손은 이성적이고 자존심이 남아있는 머리와 교신을 끊고 남몰래 슬그머니 그 사과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는 대충 씻고는 씹어먹기 시작했다. 풍부한 사과즙이 입술을 흘러나와 턱과 목을 거쳐 가슴까지 흘러 내려가는 것을 느꼈으나 그 향긋함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세 개의 사과를 허기진 곰처럼 씹어먹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맑아지고 주변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제야 아까 단번에 바닥에 쓸어 던져버린 식탁의 인형들이 바닥에 여기저기 처참히 널브러져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매우 처참하고 슬픈 전쟁의 참사를 보는 듯했다.

하나하나 다시 주워 올리는데 내가 가장 아끼던 인형의 머리가 떼어져 나간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마치 전장에서 전사한 친구의 시체를 보는 듯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런데도 이런 잔인한 만행을 자행한 나의 이성은 왠지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인형들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나의 인형 친구의 떨어져 나간 목을 강력 접착제로 정성스레 붙여놓았는데 너무 흥분된 마음으로 접합 수술을 하다 보니 실수로 목을 몸통과 어긋나게 붙인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이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대로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처절한 날이 또 있을까.     


인형들을 처음 그 자리에 하나하나 놓으면서 인형들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인형들은 제각기 자신의 본 표정을 잃지 않고 웃고 있었다. 그들에게 고통의 기억은 없는 듯하다.

고통은 오직 나에게만 있었던 것이다.

모두 다른 크기와 무게, 그리고 각자 태어난 환경에 맞는 얼굴과 제각각의 색다른 옷을 입고 있는 인형들을 보면서 그제야 나의 머리는 생각한다.

인간이 정해놓은 평등의 어설픈 수치적 눈금에 대해, 어설픈 문명의 수치적 규범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리고 신의 도구로 생각했던 정 팔 등분하는 사과 칼은 단 한 번의 쓸모도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https://youtu.be/-OKPOpp3J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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