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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우 Aug 21. 2022

[영화] 잠자는 청춘

청춘의 색

잠자는 청춘

沉睡的青春 / Keeping Watch / 2007 / 대만 / 청펀펀 감독     

출연 : 장효전(서청청). 곽벽정(죽은 채자함의 친구 진백우)



세계 각국의 영화를 곰곰이 보다 보면 각 나라마다 영화의 테마나 분위기 그리고 진행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특히 상업영화보다는 예술영화에서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예술영화는 상업성을 고려한 대중을 의식하지 않은 개인적인 영화이며 작가나 감독은 자신이 사는 현실을 왜곡할 필요 없이 솔직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영화제 등에서 수상을 한 서구의 영화들을 보면 우리는 늘 좀 지루하거나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너무 대사가 없어 답답하고 필요 이상의 롱테이크, 그리고 이유 없는 급격한 전개와 허무한 종결 등. 그래도 그것은 영화제 수상작이고 예술에 가까운 훌륭한 영화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 못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뜻 모를 중압감에 자신의 솔직한 느낌을 낮추며 감춰버린다. 그것은 반대로 서구의 감상자가 동양의 예술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왠지 알 수는 없지만 저것이 깊은 동양의 사상일 것이다 라며.

우리는 타문화의 영상을 정확하게 보고 느낄 수 있을까? 각국의 언어가 너무 달라서 외국어의 언어의 정서까지 이해하는 것은 힘든 것처럼 각 나라의 영상언어 또한 타문화권의 정서로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대사가 없는 영상이라고 해서 다른 문화권 영화의 영상미과 정서를 체질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실은 중압감에 의한 거짓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알길 없는 답답한 문화적 소통의 문제 때문에 영화 내용 중 조그만 부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을 발견하면 기쁘고 그래서 훌륭한 영화라고 말하곤 한다. 마치 외국인과 영혼 없는 대화를 하다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몇 마디에 감탄하여 어느새 영혼이 통하는 사이가 됐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요즘의 인터넷을 통한 세계화 시대에서는 다양한 매체로 외국의 문화화 언어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 결과 제3세계의 영화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영화들이 지금껏 없었던 세계 영화제에 수상을 했는데 그것은 그만큼 서구에서 동양의 문화적 언어를 전보다 훨씬 많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도 그동안 몰라서 답답했던 것들이 조금씩 알고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일 것이다. 그들도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의 기쁨을  훌륭하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중동이나 라틴, 동유럽 등의 제3세계 영화를 보고 어쩐지 감동적이고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아주 작은 포인트라도 이해하고 거기서 발견한 약간의 동질감이 증폭되어  내뱉는 찬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 같은 발견의 기쁨의 심연에는 위험한 함정도 있다. 이해라는 기쁨의 저편에 도사리고 있는 괴수의 정체는 바로 이해한 후의 무료함이다. 산의 정상은 아직 오르지 못했을 때 가장 신비로운 것이다 그래서 막상 힘들게 정상에 올랐을 때 기쁨은 정상의 안개처럼 잠시 후 안개가 걷히면 그곳엔 일상이라는 정복함 뒤의 무료함 만이 있을 뿐이다.

희망은 도달하면서 뒤처진 추억이 되고 신비함은 지루함으로 증발된다. 어떤 것을 완전히 이해하여 소화하는 순간 그 대상은 사라지고 황량한 빈 접시만 남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대상을 향하여 그것을 반복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모르는 언어, 모르는 영화, 모르는 음악은 신비한 정상을 향해 진행 중인 희망이며 아직 먹지 않은 음식을 앞에 둔 행복한 출출함이다. 그런 ’아직 모름‘으로 인한 설레는 상태는 첫사랑의 나날처럼  시간이 멈추기를 바라는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이다. 그리고 결혼함으로써 그것은 마무리되어 평범한 일상이 되는 것이다. 

결국 모르는 언어. 모르는 동양사상, 낯선 영상의 신비... 이것들이 제3세계의 문화를 접하는 즐거움의 원인이며 이유인 것이다.     


영화를 설명하기 전 생각이 너무 길었다.     



영화 ’ 잠자는 청춘’는 일반적인 감성영화? 의 한계를 넘어선 독특하고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의 매력이 있는 영화이다. 감성영화라는 장르는 따로 없지만 대개 영상미를 강조하며 스토리보다는 시적인 시청각의 느낌을 강조한 영화일 것이다. 그런데 대개의 감성영화라는 것들이 감동이나 감상 후의 잔상이 없는 것이 많은데 아마도 그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깊이 없음과 가벼움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유독 청춘에 관한 테마로 작업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무분별하게 환상적인 영상과 영혼 없는 대화, 의미 없는 스토리 등. 그래서 우리가 청춘을 돌아볼 때 왜 그처럼 가벼웠을까 라며 다시 돌아가서 되돌리고 싶은 이유는 그것이었을까.

이 영화도 전반부는 그런 느낌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그것이 지루해질 무렵 영화는 과거의 기억과 상처를 스토리에 주입하면서 후반부는 반전처럼 전혀 다른 영화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것이 이 영화가 일반적인 감성영화와 다른 땅에 있음을 알게 해준다. 대개 감독이 각본까지 한 영화들에게서 이런 점을 많이 보는데 이 청펀펀 감독은 이영화가 데뷔작이라서 그런지 더욱 시나리오에 신경을 쓴 것 같다. 이후의 작품들을 보면 그게 사실이다.     


시놉시스는 대략 이렇다.

집 나간 부인을 그리며 나머지 일생을 기다리는데 소비하는 은퇴한 시게수리점 아저씨.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설픈 소녀시절을 지우고, 그렇다고 미래를 희망하지도 않은 채 따분한 일상을 살아가는 시계수리점 아가씨 서청청.

어느 날부터 서청청에게 동창이라며 고장 난 시계를 고쳐달라고 찾아온 남자 채자함은 작업 들어가듯 매번 시계 핑계로 찾아오는데... 실은 그는 학창 시절 혈맹 같은 친구 채자함을 잃은 충격과 상실감에 자신을 채자함이라 착각하는 '진백우'라는 친구이며 그 때문에 지금은 정신병원에 살고 있다. 

그가 '서청청'과 데이트를 하면서 그리고 그녀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하나하나씩 밝혀지게 되는데 그것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쓸쓸하게 멍 때릴만한 색이었다.

영화는 그 색이 지워지기 전에 끝난다. 그 색이 지워지지 않는 한 그는 언제까지고 잠자는 중이다.     


청춘은 어떤 색일까. 실은 색이 없는 색이다. 아직 색을 만들고 있는 시기이다. 그것이 정상적인 성장 속도인 것이다. 그 색이 완성될 때 청춘은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색으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간다. 

빨 주 노 초...처럼 단순한 색만큼 단조로운 인생은 없겠지. 반면 파스텔조의 색은 여러 가지 색이 혼합된 이름 없는 색이고 색이라기보다는 분위기인 것이다. 인생의 색이 파스텔조라면 그것은 혼탁함이 아닌 풍부함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컬러를 만들고 있는 중이라면 팔레트에서 여러색을 두려움 없이 섞어보자. 어떠한 경험도 모험도 시련도 무의미한 색은 없다. 최소한 유치한 원색으로 점철된 초라한 완성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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