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demar Bastos(발데마르 바스토스 1954~2020 앙골라)
지난 8월 9일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앙골라의 싱어송 라이터 Waldemar Bastos는 66세에 지병으로 죽었다.
그러자 프랑스에서는 올해의 음반으로, 미국에서는 월드뮤직 베스트 100곡에 포함되었고, 어느 유명한 저널리스트는 "죽기 전에 들어야 할 1000곡에 하나라며 떠들어 대었다.
또한 프랑스의 Mondomix라는 웹진은 "그는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에 대한 확고부동한 긍정이다."라고 말했고, 어느 라디오 채널에서는 "만약 당신이 로맨스를 꿈꾼다면, 그리고 그 소망이 몹시 간절하다면 발데마르 바스토스의 이 앨범이 그 꿈을 완벽하게 실현시켜 줄 것이다."라고 상업적으로 찌든 멘트를 했으며 어느 누군가는 "그의 노래는 오랜 식민지 통치와 내전의 아픔을 승화한 앙골라의 서사시이며 인류를 향한 위대한 영혼의 음유 시"라며 정치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짖거렸다. 심지어 앙골라의 초원을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어떤 기자는 Bastos를 "자이르 초원에서 울부짖는 사자의 목소리"라며 포효하였다.
그런데 Waldemar Bastos의 순박한 얼굴을 보면 어쩐지 그런 표현들과는 동떨어진 혹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마치 요즘 대중들이 상업적 언론에 의해 그 어느 때 보다 깊어진 정치적인 양극화와 단순화에 혈안 된, 그리하여 폭력화된 사람들을 향해 먼 곳을 가리키며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뜻 모를 미소를 짓는 것과 같았다.
물론 그가 살았던 초기의 정치적 불안과 갈등은 매우 험난하였지만 그는 그럴수록 정치적인 단순한 이념들에게서 도피하여 자신의 혹은 인간의 내면으로 빠져드는 계기 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앙골라는 애초부터 연약한 나라였다. 그래서 500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 포르투갈에 지배를 받았고 그러는 동안 400만 명에 달하는 앙골라인들은 브라질 등에 노예로 팔려나가는 어두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1975년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이란 타의에 의해 독립국가가 되었지만 그때부터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가를 장악한 사회주의 계열의 "킴분두족을 중심으로 한 MPLA(앙골라 인민해방운동)과 '바콩고족'을 중심으로 한 FNAL(앙골라 해방 인민전선) 그리고 오빔분두족이 결성한 UNITA(앙골라 완전 독립 민족동맹)의 30년에 가까운 골육상잔의 내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2002년에 MPLA의 독재 지도자가 사망하고 나서야 정부군과 반군의 화해로 평화의 바람이 시작되었지만 그때까지 앙골라는 국민의 1/3인 400만 명이 이미 난민으로 전락한 후였다.
1954년에 발데마르는 간호사였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그다지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음악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당시 음악계에 유행하던 미국, 브라질, 쿠바, 포르투갈 등의 음악의 영향 하에 자랐다.
그가 음악적으로 성장하고 어느 정도 앙골라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국가의 독립은 이루어졌지만 이후 주도권을 잡은 강력한 사회주의 군사정권의 광폭함과 함께 그가 앙골라에서 음악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어두워져 있었다.
28살에 발데마르는 국제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자격으로 출국하여 곧바로 포르투갈에 망명을 하기에 이른다.
망명이란 정치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음악을 더 하고 싶어서 정치에서 도망친 것뿐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의미와 사상과는 관계없는, 단순히 어린아이의 굶주림에 의한 탈출 같은 것이다.
발데마르는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앙골라의 반정부 예술가로 낙인찍혀 조국을 등지고 유랑하는 동안 포르투갈과 브라질에서 오히려 음악적 안정과 성장을 할 수 있었는데 그때 브라질의 반정부 음악가인 '쉬쿠 부아르키'와 교우하며 'Estamos Juntos'라는 첫 앨범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앨범의 테마곡이자 이 영상의 음악인 'Velha Xica'(늙은 시카)는 "아이야, 정치에 대해 말하지 마라"라는 부제가 있다. 어느 한 곳에 치우치치 않는 비당파주의의 진정한 평화를 노래하고 있다.
그의 두 번째 앨범 Angola Minha Namorada', 세 번째 앨범 'Pitanga Madura', 네 번째 앨범 'Pretaluz : Blacklight', 은 이렇게 각국을 유랑하며 만들어졌고 다섯 번째 앨범 'Renascence'는 앙골라가 평화를 찾은 후에 만들어진 앨범으로 가장 따뜻한 느낌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앨범 'Classics of My Soul'은 그가 생각하는 평화에 대한 신념과 메시지가 담긴 앨범으로 앙골라에서 발매된 최초의 그리고 마지막 앨범이다.
그는 망명 기간 동안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여러나라의 '세계 평화음악 페스티벌' 같은 행사에 자주 초대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느 날 '세자리아 에보라' 같은 월드뮤직의 표상적인 인물이 되어있었다.
요즘 진실과 정의와는 관계없이 쏟아지는 인터넷 사설 뉴스와 대중들의 무분별한 댓글 참여문화는 다양성보다는 오히려 몇 개 안 되는 혹은 단 두 개의 테두리에 갇혀서 특별함과 창의적인 것은 어이없게도 두 가지 색갈 안에 갇혀버렸고, 제3의 것에 대한 것 또한 무차별하고 폭력적인 유린이 일상화된 차갑고 어두운 시대이다.
발데마르의 개인적인 평화로운 느낌의 음악은 그 어느 정치나 이념에 갇혀서는 안 되며 가둘 수 도 없는 가장 비정치적인 음악 이어야 한다. 그것을 어디인가 이용하는 것은 낮 뜨거운 일이어야 한다.
발데마르 바스토스의 주요곡 감상
https://www.youtube.com/watch?v=2L6uWSj1u_g&list=PL43T1ehjnKSUFG95jJal932YcxF8so76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