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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우 Oct 24. 2020

불행한 과거와 소박한 과거의 충돌

세르게이 예세신과 이사도라 던컨 그리고 고향

https://youtu.be/B30fjKrauqs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 

- 세르게이 예세신-


아직 살아 계시죠 늙으신 어머니.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어머님도 그러시겠죠.

어머니의 오두막에 늘 아름다운 저녁 빛이 가득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어머니는 나에 대한 걱정에 애태우시며

낡은 옷을 걸치시고 내가 언제 올지도 모를 길가에서 

자주 서성거리신다고 들었어요 


내가 혹시 술집에서 싸우다 칼에 찔려 죽을 까 봐

걱정이 많으시지만

나는 어머니 얼굴을 보지도 않고 죽어버릴 정도로

술독에 빠져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자꾸 추운 밖에서 서성이지 마시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서

편하게 기다리고 계세요. 


나는 이제 곧 어머니의 나지막한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이층의 내 침대에서 편하게 자고 싶어요.

그리고 이제는 어른이 되었으니 

전처럼 아침 일찍 깨우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상실과 피로에 젖어 있어요

충분히 잠을 잔다고 해도 피로가 없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마치 아물 수 없는 상처처럼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어차피 나는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어머니가 곁에 계신다면 그보다 편한 기쁨은 없을 거예요

아마 행복할 거예요.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불안해하지 마시고 

낡은 옷으로 길가에서 서성이지 마세요

그러다가 감기 들겠어요


- - - - - - - - - - - - - - - -


집 떠난 남자들이 수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그때마다 위안을 받는 것이 있다.

고향의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다. 걱정 자체가 위안이 되는 것이다.





이사도라 던컨과 세르게이 예세신


1921년 모스크바의 어느 화려한 파티장에는 창밖의 푸른 한기와는 전혀 다른 뜨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담배연기 몽롱한 시끌벅적한 흐름 안에서 반쯤 감긴 그녀의 술에 취한 눈은 유독 총명해 보이는 금발 청년에게서 시선을 놓지 못한다. 발레학교 개설을 위해 모스크바에 온 그녀는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금발의 청년은 아직 때 묻지 않은 러시아의 국민적인 천재 시인이며 더더욱 부와 환락에 대해서는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성에 감싸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재력과 아직 조금 남아있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으로 그를 충분히 감싸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럼으로써 그가 자신의 너덜거리는 영혼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으리라는 것을 희망했다.  

금발이 빛나는 젊은 청년도 그녀를 진즉 알고 있었다. 다만 모른 체 하고 있었다. 그녀는 세계적인 인물로서 모던 무용을 개척한 천재 무용수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눈에 차지는 않는 중년 아줌마이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이 상상도 못 할 재력이 있고 그것이 자신을 이 좁은 모스크바를 벗어나 세계로 발돋움할 수 있는 도약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런 두 사람은 간단하게 혹은 숙명적으로 여인의 단 한 번의 키스로 그 순간부터 연인이 되었다.

45세의 '이사도라 던컨'과 27세의 '세르게이 예세신'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유럽과 미국 여행을 위해 늘 거처야 할 귀찮은 신분을 정리하기 위해 던컨은 10년 연하로 속여 결혼 신고를 하였다.

예세신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세계 각지에서 초 부유층들과의 파티를 신기한 듯 즐기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그의 시처럼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서 조용한 벌판의 야생초 같은 정체성을 가진 청년에게 이런 색다름이 그리 오라 갈 수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부와 환락에 갇혀버린 이 청년은 얼마 안 가서 그것들에 대한 거부감이 부풀어 오르고 그것이 폭발하자 난폭한 술주정뱅이 남자로 변해버렸다. 습관적으로 호텔의 기물들을 파괴하였고 '던컨'과 싸울 때마다 늙은 암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정말 슬픈 것은 그는 이미 시를 버렸고 지금까지 그의 정체성이었던 전원의 순박한 영혼이 썩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게도 점점 돈의 노예가 되었으며 인간보다 값비싼 명품들을 추앙하는 인간이 되었다. 

들판의 자유로운 들개를 화려한 호텔 방에 가두자 서서히 미쳐가는 들개를 보는 것처럼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비참함이었다. 선천적 프롤레타리아가 급격한 부르주아는 견딜 수 있겠는가. 

'던컨'은 욕심이 많은, 그래서 가련한 여인이다. 

홀어머니 아래서 매우 비참하게 가난한 생활을 해야 했던 어린 던컨은 자신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홀로 산과 들에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춤추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때 까지가 그녀의 인생의 가장 아름다움이 찬란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춤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돈과 명예가 쏟아지듯 밀려왔다. 재벌과 결혼하여 화려한 생활을 하였고 두 아이를 낳아 행복해질 무렵 두 아이는 보모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두 아이를 잃는다. 그때부터 그녀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여성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점차 상실되어 가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행복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때 그녀는 예세신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약으로도 젊음을 다시 찾을 수 없듯이 재력으로 순수한 사랑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그 둘은 일 년이 조금 넘자 헤어졌다. 살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 후 던컨은 점차 퇴락하여 경제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피폐해졌고, 예세신은 점차 무절제한 삶의 구렁텅이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새로운 아내와 아이를 두고 호텔방에서 자살한다. 

안녕히 나의 친구여, 내 사랑이여 라는 시를 혈서로 쓴 후에 목매달았을 때 그의 나이는 이제 불과 30세였다.


그리고 2년 후 던컨은 새 애인의 스포츠카 부가티를 타고 가다가 긴 스카프가 뒷바퀴에 꼬였고 그 때문에 목이 졸려 죽었는데 그녀는 부가티로 출발하기 전에 이런 말을 외쳤다. 

"새로운 영광을 위해 출발~!"

죽음은 평소 자신의 영혼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될 때까지 지상을 떠나지 않겠다는 그녀에게 일침을 주었고 그것을 결국 그녀의 소원대로 된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하는 어리석음을 끊어주었다.




예세신의 또 다른 

어머니에의 편지 


이제

뭘 더 생각할 것이 있겠는가,

이제 뭘 더 쓸 것이 있겠는가?

내 눈 앞

우울한 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의 편지.

어머니는 이렇게 쓰신다.


될 수 있으면 말이다, 얘야,

크리스마스 때

우리한테 내려오려무나.

내게는 목도리를 하나 사주고,

아버지께는 바지를 한 벌 사다오.

집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단다.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못마땅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나도 이젠 늙었고

몸도 영 좋지 않단다.

………

사랑하는 내 아들아,

대체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그토록 얌전하고, 그토록 순한 아이였는데.

모두들 앞을 다투어 말하곤 했지.

저 아이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네게 품었던 우리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구나.

게다가 더 가슴 아프고 쓰라린 것은,

그나마 네가 시로 버는 돈이 꽤 많을 것이라는

허황한 생각을

네 아버지가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얼마를 벌든 간에,

네가 돈을 집에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지.

네 시가 그토록 서러운 걸 보면

나도 알겠다,

시인들한텐 돈을 잘 안 준다는 걸.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못마땅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요즘은 온통 슬픈 일 투성이다.

암흑 속에서 사는 것만 같구나.

말(馬)도 없단다.

네가 집에만 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에겐 모든 게 있을 텐데,

네 머리로 동네 읍장인들 안 됐겠느냐.

그랬더라면 더 당당하게 살았을 텐데,

아무한테도 끌려 다니지 않고,

너 역시나 필요 없는 고생은 안 했을 텐데,

네 처한테는 실 잣는 일이나 시키고,

너는 아들답게 우리의 노년을 돌보지 않았겠느냐.”

………

 편지를 구겨 버린 나는

우울해진다.

정말이지 내 이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그러나 내 모든 생각은 나중에 털어놓으련다.

답장에서 털어놓으련다...

 

 

<답장>


내 늙으신 어머니,

사시던 대로 그냥 사세요.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다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요.

하지만 내가 무얼 위해 사는지,

이 세상에서 무얼 하며 사는지

어머니는 눈곱만큼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

어머니!

눈보라 속에서 어떻게 잠이 들 수 있지요?

굴뚝에선 웅웅대는 소리가 그렇게 불평하듯 늘어지는데.

몸을 뉘려 하면, 보이는 건 침대가 아니라 좁은 관이고,

꼭 무덤에 들어가는 것만 같을 테지요.

………

내가 사랑하는 그 봄을

나는 위대한 혁명이라 부르지요!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거예요.

그 하나만을 기다리며 불러대는 거예요.

그런데 이 가증스러움이란

레닌의 태양으로도 여태 덥혀지지 않는,

우리의 이 차가운 지구 말이에요!

바로 그래서

시인의 아픈 가슴을 안고

추태를 부리기로 나선 거예요.

술 마시고 싸움질이나 하면서 말이에요.

………

돈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세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시라고요.

죽음이라니요?!

왜 그러세요?

내가 뭐 외양간에서 끌어내야 하는

소는 아니잖아요,

말이나 당나귀도 아니고 말이에요.

때가 오면, 지구에

불을 지펴야 할 때가 오면,

내 발로 나가겠어요,

그리고는, 돌아오는 길에

목도리를 사드리지요,

아버지께는 말씀하신 바지도 사드리고요!



예세신이 죽은 후 던컨은 그의 짐을 정리하다가 그의 옷에서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예세신이 고향에 보내기 위해 던컨 몰래 모아두었던 돈다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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