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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동 May 05. 2020

이건 문학이 아니다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국어시간.

모두의 책상엔 EBS 수능교재의 마지막 코스 '수능완성'이 놓여져있었다.

능을 며칠 앞둔 그 날,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전할 말이 있다며 교재를 들어보이셨다.



"이건 문학이 아니야."



'너희가 지금까지 배운건 문학이 아니야. 이건 그냥 시험이고 문제풀이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속에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선생님이 아무래도 감정적으로 고조가 되어있으셨나. 하기사 때때로 동화책을 들고 오셔서 고등학생들에게 읽어주기까지 했던, 글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던 분이셨으니 마지막 수업 소감으로 저런 말을 할 만도 하셨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말씀을 얼마나 참으신걸까.

그리고 그 말은 내 가슴에 어떤 파문을 남겼는가.


"문학에는 정답이 없어. 다양한 삶이 있어요.

여러분이 어떤 전공을 하든, 무엇을 하게 되든, 문학을 항상 곁에 두기를 바래요.."



중학생 때부터 문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전공을 하고싶었지만, 고교 입학 직후 나도 다른 길에 끌린 적이 있었다. 바로 사회과학이었다. 이해는 못해도 제목이 유명해 읽은 책과 신문을 통해 접한 사회학, 경제학은 그렇게 강해보일 수가 없었다. 그 분야의 지식은 밀려오는 거대 파도와 같았고, 입시라는 끔찍한 부조리를 겪는 중이었던 내겐 가장 확실한 희망과도 같았다. 


'야, 순두부같은 문학하지말고 강철같은 사회과학을 하자. 꿈은 영화인이지만 최종 목표는 결국 너도 좋은 사회 만드는거 아니야? 이걸 배우자구.'


하지만 그 다짐은 2년이 조금 지난 후에 흔들리게 되었고, 고3때쯤엔 그 중요한 원서를 다 사회학과로 써놓고도 이게 맞는 일인가 긴가민가했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낙방을 하였다.

그리고 재수를 시작한 겨울, 나는 내 예전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조용필의 '꿈'을 들은 날이었다.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나는 국어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문학이란게 대체 뭔지 제대로 맛보고 싶었다. 사회학도 너무 좋았지만 - 그래서 대학 내내 염탐 아닌 염탐을 하고 다녔지만 - 내가 있을 곳은 인문대 그중에서도 가장 예쁜 우리말을 배우는 국문학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부를 마친 지금까지도 문학은 내 곁에 없는 것만 같다.

아니, 차라리 고등학생 시절 문학은 내 가까이에 있었고 그 이후부터 난 점차 그와 멀어졌다는게 맞다.


나는 유독 수험생 시절 국어 교재 펴는 것이 좋았다. 그 안에는 사막 안의 오아시스처럼 연못이 곳곳에 놓여있었다. 다 같은 색, 다 같은 필체의 삭막한 수험생의 일상에 그 짧은 문학의 토막들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가. 누구나 다 아는 명시 명소설이 그땐 내게 너무나 새로웠고, 한 구절 한 구절 가슴 깊이 박혔다.


<자화상>은 지난 중고교 시절을 이따금 추억하게 해주고, <바위>와 <절정>은 꿈과 목표를 향한 의지를 되새겨 주었고, <향수>는 이 도시에선 찾을 수 없는 '별'의 모습을 그리게 해주었다. 이청준, 황석영, 박완서 같은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면 지금은 사라진 거리와 골목을 직접 거니는 것 같았다. 보일러 난방으로 후끈거리고 답답하기만 했던 교실 혹은 학원 강의실에 눈꽃이 서렸고, 속으로 삼켜읽느라 혀끝에 달려있던 문장은 이슬처럼 빛났다.


대학에 가면 이 시냇물은 강이 되고 바다가 되겠지. <배반의 여름>처럼 뜨거운 계절을 넘어 <눈길>의 쓰라린 겨울까지 만나게 되겠지. 이야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배우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별을 그저 종이에 쓰는게 아니라 직접 올려다보며 살아가게' 되겠지. 뭐 그런 생각들이 있었다. 대학을 마치는 그날 이후에도 쭉쭉 그런 삶은 이어질거라 당연히 여겼다.


그치만 꽃이니, 물이니, 별이니 하는 단어들은 내 곁을 점점 떠나갔다. 마치 밤의 들판 너머로 사라지는 작은 반딧불이들처럼, 아스라이.


내가 기대했던, 소박한 글을 쓰고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과 삶을 고민하는 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일방적 강의와 서로 다른 관심사의 편차 탓도 있겠지만 나의 게으름도 한몫했다고 본다. 새내기 때부터 교수님들은 꼰대로 보였고 문학 평론은 고매함에 중독되어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키고 좋아하는 것의 토대를 닦기보다 그저 남에게 반대하는 데만 바빴던 것 같다.  수업을 등질 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도 덜 읽게 되었고, 사람들과 기대하던 대화를 하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해졌다.


물론 때로는 문학의 우물을 마주치기도 하였다. 작품이 오기도 하였고, 작가의 마음이 오기도 하였고, 또 때로는 작품을 만드는 수많은 '말'들이 오기도 했다. 학과의 한글날 행사였던 '영어 제목 한국어로 바꾸기 대회'에서는 장원을 하기도 했다( 'Frozen'을 '눈꽃장막'으로 바꾸었었다 ).


하지만 말의 조각을 하나하나 모으는 덴 한계가 있었다. 내 안에 그것들을 담아둘 공간이 없었다. 말을 담지 못하니 삶은 오죽할까?

삭막했다. 사막의 온도가 너무나 뜨거워서 물방울 하나가 어디선가 찾아와도 금세 소멸했다. 이야기를 읽는 덴 경청이 기본인데, 그게 아니라 '분석'이 더 중요해졌다. 몸의 피와 살이 아니라 뼈만 보는 꼴이었다. 뼈의 발굴, 그것의 정돈, 그리고 이름 붙이기.


작품을 그렇게 읽다보니 세상도 그렇게 보게 되었다. 어디서 발원한지 모르는 조급함과 열등감이 모든걸 '빠르게 그리고 간단하게' 처리하길 바랬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이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 이 도시는 어떤 도시. 마치 수능 교재에 나온 핵심 요약과도 같았다. 1번 주제, 2번 성격, 3번 문체... 국어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결코 '문학이 아닌' 것들처럼 나는 살고 있었다.


대입 논술 공부를 하며 귀에 못박히도록 들은 세 마디가 있다. '간결' '명료' '두괄'. 모든 글과 주장엔 논리가 있어야 하고, 일관성도 있어야 한다. 사회는 말한다. 복잡한걸 간단하게 하는 것은 어렵지만 해내야 하는 일이다. 삶의 군더더기는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남을 설득할 때 객관적인 근거를 가져오고 자료를 정리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목표를 정하고 이를 먼저 생각해야 성취할 수 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하여, 성공하기 위하여.


그러나 문학이란,

적어도 수험생 시절 내가 꿈꾸던 그리고 선생님이 말씀하 문학이란,

그런걸 위해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문학과 멀어졌다. 좀더 솔직하게 쓰면, 문학에 대한 그 어떤 주장이나 정의와도, 지금의 나는 가까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어디있는지 모를 그곁으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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