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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동 Mar 31. 2021

벚꽃이 예쁜줄 몰랐다

I.O.I - 벚꽃이 지면

난 원래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시각), 가공된 향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꽃냄새는 시큼했다(후각). 장미같은 꽃은 가시 때문에 만져보기도 겁났다(촉각). 가장 맘에 안드는건 그 정적인 특성이었다. 동물원과 식물원 중에 고르라면 난 언제나 동물원이었다. 동물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소리를 내니까. 영상과 사진의 차이라고나 할까? 난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에 좀더 끌리는 성격인지라, 주말이나 연휴에 꽃구경 간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봄철의 어마어마한 벚꽃구경 인파는 나에겐 다분히 이해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파리도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그 꽃의 물결을 보겠다는 핑계로 굳이 복잡한 여의도 윤중로에, 사람이 가득한 곳에 제발로 걸어들어가는 이들을 보며 일면 유행을 따라서 노스페이스를 입는 것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곤 했던 것이다.


물론 나도 그 행렬에 동참한 적은 있다. 갓 대학생으로서 넘치는 시간적 여유를 증명해보일 수단 중 하나로 난 벚꽃구경을 택했었다. 허나 생전 처음 윤중로에 간 날, 매서운 바람이 불어 눈 뜨기도 힘들었고 난 추위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라 역시 이번 생에 꽃구경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런 내가 어쩌다 '꽃'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우선 한숨부터). 때는 2016년, 고교 졸업 이후 관심을 껐던 가요계가 다시금 나의 흥미를 끌었다. 대히트를 친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은 '꽃길만 걷게 해줄게요'라는 불세출의 유행어를 남겼고, 그 프로의 마지막화에는 '벚꽃이 지면'이라는 노래가 나왔다. '벚꽃이 지면'은 I.O.I(아이오아이)의 첫 앨범에도 실렸다.


그해가 다 가도록 그룹의 명곡 중 하나로 난 이 곡을 꼽았는데, 순전히 가사 때문이었다.


'벚꽃이 지면 / 우리 사랑은 / 여름처럼 뜨거워질 수 있나요

우리의 시작이 / 조금 따뜻했다면 / 이젠 좀더 뜨겁게 / 서로를 안아줘요'


그때까지 난 벚꽃이 진 이후를 이처럼 희망적으로 그려낸 노래나 글을 접한 적이 없었다. 꽃이 싫고 꽃구경이 사치처럼 느껴진 나에게도 국어교과서를 통해 배운 일반적인 '관념'이 있었으니, 바로 벚꽃은 '덧없이' 져버린다는 사실이었다. 이 곡을 듣기 전, 내게 벚꽃은 짧게 강렬히 피었다가 힘없이 우수수 떨어지는 낙화, 무심한 세월의 상징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곡은 그런 낙화 이후 더 찬란한 여름에 대한 기대를 노래하고 있다. 꽃이 지는 것이 결코 슬프기만 한건 아님을, 이 노래를 듣고 처음 깨달았다. 비록 부침이 많았으나, 아이오아이가 활동하던 그 해는 분명 완연한 봄이었고, 푸르른 실록으로 찬 여름이었다. 개인적으로도 무너진 잔해를 딛고 일어서는 시기였던지라, 추억 보정이 다른 과거의 몇 배나 되지만 - 이를 고려해도 참, 좋은 날들이었다. 그 좋은 날이 끝나갈 때 흘린 눈물은 슬픔보단 고마움과 희망에 가까웠다.


허나 해체 이후 아이오아이의 노래와 활동, 이에 얽힌 팬들의 이야기는 과거 저편으로 쏜살같이 사라져갔다. 또 다른 해, 또 다른 해가 계속해서 찾아왔고 어느덧 오늘, 모든 것은 5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분명히 여름은 뜨거우리라고 했건만. 눈 깜짝할 새 여름도 지나가고 계절의 바퀴는 거침없이 굴러갔다. 그 노래가 나올 무렵 '처음' 졌던 벚꽃은 벌써 다섯 번 째 질 일만을 남겨두고 있다. 우주의 어떤 질서가 요동치지 않는 한 올해에도 낙화가 이어지겠지.


그렇게 벚꽃은 내게 다시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벚꽃이 진 후의 여름마저도, 매일의 노을처럼 타올랐다가 다시 진다. 가을의 황금 들판도, 지붕을 빛내던 하얀 눈들도 계속해서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매해 봄마다 '벚꽃이 지면'을 들으며 16년도를 떠올린다한들, 느껴지는 것은 점점 아득해지는 그날의 추억들 뿐이다. 이보다 더 시간이 흐른대도, 더해지는 것은 안타까움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이 원망스럽진 않다. '그리움'은 알지만 그리운 대상은 너무 아득해 향기를 맡지 못하던 내게 또다른, 새로운 그리움이 생겨났으니.


16년 이후 일고 부서져온 시간의 파도 속에서, 나는 벚꽃이라는 포말을 보다 더 또렷이 보며 살아간다. 봄마다 직접 뒷산을 오르고 바람결에 떨어지는 꽃잎의 모습 하나하나를 눈으로 짚는다.


난 이제 다른 계절에도 꽃을 더 자주 본다. 지루하고 정적이던 모습은 이제 고요한 안온함으로 바뀌어 보인다. 봄에는 벚꽃을 맞으며, 여름과 가을엔 벚꽃을 떠올리며, 겨울엔 벚꽃을 그리워하고 애타게 원하며 길을 걷는다. 그러다 문득 마주한 정적에 가끔 이 꽃을 처음 느끼게 된 때를 떠올려도 본다. 그 해, 그리고 인생의 모든 시기에 갑자기 찾아온 만남과 너무 급히 맞이한 이별들을 그리워하며.


그리하여 이젠 시간에서 꽃의 향기가 난다.

벚꽃의 아름다움을, 이제야 비로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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