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떠오른 여행의 순간
지난 주말, 인사동에서 열린 농부 시장에 다녀왔다.
비좁은 골목을 들어가니 낡은 콘크리트 건물이 나왔고, 그 앞에서 QR코드를 찍었다.
1층의 커피장을 다 둘러보고 2층 요리 시장으로 올라가기 위해 작은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반대쪽에서 한 남자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한 칸 한 칸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아이가 한 칸 씩 내려올 때마다,
나는 한 칸 씩 올라갔고,
얼굴 모르는 어떤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Eins, Zwei, Drei, Vier..."
2년 하고도 4개월 전, 스위스 체르마트의 작은 호텔.
아침을 먹은 후에도 한참이나 1인용 침대에 편안히 기대 누워있던 찰나였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복도에서 별안간 한 아이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다섯살 쯤의 목소리를 가진 아이는 앙증맞은 독일어로 하나씩 숫자를 셌고, 할머니가 똑같이 숫자를 읊어주고 있었다.
독일어를 잘 모르지만 다른 언어들을 주워들은 바 있는 나는
그게 숫자겠거니 하고 귀여운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둘의 발소리는 아주 부드러워서 숫자로만 그들이 칸을 어디쯤 올랐는지 알아차릴 정도였다.
한적하고 고요한 동네에 울리는 것은 두 사람의 목소리 뿐이었다.
한 30분 쯤 후에 그들이 이번엔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이번에도 똑같이 숫자를 읊었다.
아까처럼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 누운 채로.
한 여름, 마테호른을 더불어 웅장한 산맥이 둘러싼 그 마을, 다른 관광객들은 바삐 여행을 재촉할 시간대.
바람에 나뭇잎 사부작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던 그 호텔에서 아이가 숫자 세는 소리를 들은 것은 나 뿐이 아닐까 짐작이 됐다.
그 짧은 소리가 이 겨울까지도 선명히 들려온다. 얼굴을 모르는 아이, 그리고 할머니의 주고 받는 숫자들. 조심스레 계단을 밟는 소리. 그들과 나 사이의 작고 긴 복도, 짙은 고동색의 나무 문과 투박하고 동그란 손잡이. 하얀 침대 시트. 높이 떠오른 해, 마냥 밝았던 창문, 마테호른 수채화가 담긴 엽서가 놓여져 있던 작은 책상. 앞으로도 한참 남아 있던 나의 유럽 여행.
지난 주말 인사동, 난 잠시 동안 그 해 여름의 계단을 올랐던 것이다.
너무나도 그립다. 사무치도록 그립다.
사랑하는 여름아, 얼른 다시 내게 오라. 달리느라 풀린 신발끈은 재게 묶고, 뒤처진 시간만큼 내게 더 빨리 오라. 이토록 간절한 네가 손짓하는 그 날, 난 모든 걸 내려놓고 네게 흘러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