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말이 없었다
“내 여자친구야.”
“응, 내 여자친구라니까.”
“이쁘지?”
지갑 속 프로필 사진은 쉴 틈 없이 들락날락했다.
사진은 점점 낡아갔고, 궁금증이 극에 달한 순간
암막 사이로 그녀가 등장했다.
“인사해. 여긴 내 친구들.”
“여긴 내 여자친구. 사진으로 많이 봤지? 하하.”
어색한 순간은 잠시였다.
그렇게 친구 모임 구성원 하나가 늘었다.
친구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여자친구의 모습에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사람 볼 줄 안다는 착각은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고향 친구, 학교 동문, 군대 동기처럼
보이지 않는 끈에라도 이어진 듯
여자친구가 불편하지 않게 챙겨주는 친구들이 기특했다.
사랑도 우정도 그렇게 깊어가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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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여자친구가 물었다.
“크리스마스에 우리 집에서 놀까?”
“어? 부모님은?”
“어디 지방에 놀러 가실 계획인가 봐.”
“오, 그래도 될까? 흐흐.”
“그래. 친구들도 다 불러서 놀지 뭐.”
“좋다, 애들한테 물어볼게.”
그렇게 파티가 시작됐다.
차례상에서나 쓸 법한 큰 상 위에는
술과 음식,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축제였다.
술이 오가고 음식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친구들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친구에게 술 한 잔 따르고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 좋은 여자친구는 그렇게 취해갔다.
“나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어, 그럼 방에 들어가 누워.”
작은 몸을 휘청이는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다 나가.”
거실로 나온 나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친구들은 물때에 맞춘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괜찮아?”
조용해진 집 안, 뒤척이는 여자친구에게 물었다.
“응, 아직 좀 어지럽네. 근데 애들은?”
“응, 다 갔어.”
“그런데 너는 왜 안 갔어?”
“응? 부모님 오늘 안 오신다며?”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어… 부모님이 갑자기 올라오고 계신데.”
“그래??”
그렇게 쫓겨나듯 뛰쳐나왔다.
애매해진 시간, 애매해진 처지.
마땅히 갈 곳도 없이,
그녀와 우리 집 사이 양천공원 벤치에 앉아
아침 해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