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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동근 변호사 Jul 18. 2019

불확실성과 의사소통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비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자신만의 이론이다. 그의 이론은 지금 현시대에서는 특별하지 않지만 정밀한 수학적 방법론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 당대 지성계에게는 신선한 이론이었다. 물체의 온도를 정확하게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물체에 온도계를 접합시키는 순간 온도계의 온도와 물체의 온도가 뒤섞여 본래 물체의 정확한 온도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가 글을 쓸 때, 자신의 글을 이 세상 누구도 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이 나올까? 제대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 누구도 보지 않는 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심지어 일기조차 그 언젠가는 누군가가 볼 것이라는 전제하에 쓰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미래의 자신일 수도 있지만 미래의 나는 또 다른 타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보지 않을 것이라는 건방진 생각에 아주 솔직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글로 쏟아내었다. 아주 잔인한 생각부터 분노, 기쁨, 슬픔 등과 같은 어린아이의 투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었다. 하지만 그것은 글이라고 할 수 없었다. 솔직함도 글의 매력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으나 오히려 지나친 솔직함은 자기 오류 속에 왜곡된 감정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도 보지 않는, 텅 빈 홀 속에서 진정한 연주가 나올 수 없다. 어느 정도의 관중이 지켜보는 그 날의 연주를 위해 하루하루 피땀 흘려 연습하는 피아니스트를 생각해보자. 글도 마찬가지다. 글은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단 몇 사람의 독자만 있으면 족하다. 진정 사람을 알려고 하는 소수의 독자만 있으면 충분하다. 사람을 안다는 것을 망각한 지금의 시대에 오히려 섬세한 감수성은 거추장스러운 나약함으로 치부되는 이 시대에 인간을 아는 것이 삶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인 그러한 귀한 독자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하다. 

거대담론 속에서 어느 한 개인의 사소한 일상사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시대의 정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획일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 정의는 개인의 구체적인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 우울해지거나 혹은 즐거워 웃는 이유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오늘 저녁에 있을 어떤 사람과의 작은 약속이 하루 종일 마음을 설레게 한다. 무심코 누가 생각 없이 던진 말에 하루 종일 우울해지기도 한다. 감정의 바로미터라고 할 정도로 쉽게 우울해지다가 즐거워하기도 하는 나는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참 불편한 감수성을 지녔다. 마음은 짧은 순간에도 정점과 저점을 수없이 왔다 갔다 하고 그러한 변화는 삶을 해석하는데도 엄청난 영향을 준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모든 것이 두려운 어린 사슴처럼 사람들 속에서는 나는 마냥 어미를 찾아 헤매는 어리숙함을 지녔다. 마음은 투명한 유리 속에서 모든 것이 다 들켜버리는 것 같아 부끄럽다. 짧은 찰나의 시간에서도 과거와 현재를 수없이 왔다 갔다 한다. 왜일까?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나는 사실 오늘 아주 사소한 일로 마음이 그다지 즐겁지 않지만 그것은 당신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그 일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뭐 그런 마음으로 스스로 의사소통을 단절시키는 것은 아닐까!

맑은 물 위에 비친 얼굴이 가을바람에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세상을 물 관조하듯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가을바람이 불어와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으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도 예측 가능한 절대공간이 아닐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시대는 이미 변해 고전 물리학을 넘어서는 세상으로 바뀌었는데, 사람만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땅 위에서 예측 가능한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오늘 내가 그 사람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제 그 사람이 나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일주일 전 내가 그 장소에 가지 않았더라면, 한 달 전 내가 그 장소에 갔더라면, 일 년 전 그 책을 읽었더라면, 5년 전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10년 전 내가 그 학교를 다니지 않았더라면, 20년 전 아버지가 나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더라면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고, 세상은 나비효과처럼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쇼팽이 그날에 발라드 4번을 작곡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라흐마니노프가 그날에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오늘 그 사람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예측할 수 없다. 그 날 내가 쓴 시가 어떤 이이의 삶을 바꾸어놓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일을 예측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 사랑도 앞날을 예측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대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는 그 사람에게 영원히 어떻게 대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랑을 하는 것이다. 불확실성은 역설적으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게 만든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지금 그의 이미지도 내 경험칙과 편견이 만들어낸, 그의 이미지가 아닌 내가 만들어 낸 내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고 그를 좀 더 깊이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정도로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 불확실성은 진정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자신보다 소중한 서로가 되어야지만 진리로 다가올 것이다. 

내 글을 읽는 그 독자가 누구일까? 그는 내 글을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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