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만든 세계사
제가 초등학생 때 많이 하던 일은 짝꿍과 제 자리 정중앙에 선을 찌익 그어놓고, "이 선 넘으면 내꺼다"라고 엄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넘는다고 해서 친구의 지우개나 연필 같은 사유재산을 제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었지만, 가느다란 연필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짝꿍과 제 공간을 분리할 수 있었죠. 도무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여긴 내 영역이다 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싶었던 욕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짝꿍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르구요.
사실 생각해보면 초등학생때 했던 제 행동은, 유독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옛날 중국의 진시황은 엄청난 시간과 인력을 들여서 우주에서도 보일 크기의 만리장성을 쌓았죠. 19세기 프랑스의 파리코뮌 투쟁에서 민중들이 쌓았던 벽, 즉 바리케이트는 저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대항해 최후의 보루로 세운 벽은 '마지노선'입니다. 이후 냉전의 상징이 된 독일의 베를린 장벽은, 양측의 국민들이 스스로 벽을 허물면서 냉전의 종식을 알리게 된 벽으로 유명합니다.
이쯤 되면 인간의 본성 중에 '벽 쌓기'를 추가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현재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이자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흥미로운 세계사 책을 출간했습니다. 바로 <벽이 만든 세계사>입니다.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벽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점을 주목한 저자는, '벽'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존재를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고, 이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과 이 갈등을 뛰어넘어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을 주목합니다. 이 과정에서 총 12개의 벽을 소재로 삼는데요. 자칫 병렬적으로 사례를 나열하는 구성이 가져올 수 있는 지루함은, 저자가 가진 필력과 풍부하게 수록된 사진자료, 그리고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벽이라는 존재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통해 말끔히 해결됩니다.
하나의 연속성을 둘로 나누는 벽이라는 존재. 이를 통해 단절되지만, 그 단절을 통해서 정체성을 얻는 집단과, 그 집단들 간의 투쟁이 만들어내는 역사의 흐름. 얼핏 어려워 보일 수 있는 주제이지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자의 필력에 감탄하며 벽을 따라서 쭈욱 걷다 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계실 테니까요.
[인터파크 북DB] 신간산책 2020.03.05 포스트에 게재한 글 입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7660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