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

by 표고

우리 집에서 내 힘으로 옮길 수 없는 가구는 딱 하나다. 안방에 놓인 책장.

책이 가득 꽂혀 있어서가 아니다. 책을 다 빼고 옮겨도 혼자서는 조금도 밀 수 조차 없는 무거운 가구다. 원목 가구에 ‘친환경’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게 좀 의아했지만 나는 가구 전문가가 아니므로 크게 궁금해하지 않기로 하고, 아무튼, 좋은 나무로 만들어진 이 책장은 처음 독립을 할 때, 부모님이 사주신 내 기준엔 나름 고가의 가구였다. 17평 작은 첫 집에서 TV가 없는 대신 거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던 월넛색의 책장. 한때는 이 책장이 뿜어내는 감성 때문에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은 첫 집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라고 자부했던 시절도 있었더랬다.



그리고 독립 후, 세 번째 집. 같이 살던 사람과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그 사람에게 화장실이 딸린 안방을 내어주고 작은 방을 내가 쓰기로 했었는데 그 방을 차지하고 있던 가장 큰 물건이 그 책장이었다. 조금이라도 쾌적한 각방 생활을 위해선 그 책장을 옮겨야 했다. 그 사람과 같이 있는 시간엔 왠지 눈치가 보여 혼자 있는 틈을 타 그 책장을 거실로 옮기고 싶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나 혼자만의 가구 옮기기 프로젝트는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아니, 시작할 수도 없었다. 가구가 무거우니 당연히 책을 모두 꺼내야 했고, 꺼낸 책들을 작은 방에 쌓아놓으면 책장을 끌고 나올 동선이 확보되지 않아 책들을 부엌 구석으로 옮기는 작업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참만에 텅 빈 책장.

이쪽저쪽에서 밀어도 보고, 들어도 보고, 할 수 있는 시도를 다 해봤지만 책장은 꿈쩍하지 않았다. 강화마루 위에서 웬만한 가구들은 조금씩 밀렸기 때문에 옮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책장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리고 같이 살던 사람이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식은땀이 삐질 났다.




아니, 책장을 좀 옮기고 싶어서...




나는 지레 찔린 것처럼 변명하고 있었다. 내쉬는 한숨 소리에 기가 죽었다. 왜 혼자 있을 때 일을 벌이냐고, 어디로 옮기고 싶냐고 물으며 팔을 걷어붙이는 그가 고마우면서도 조금 서글픈 기분이었던 것 같다.


책장은 3단이었다. 맨 윗단은 앞뒤로 뚫려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양 끝 칸의 책장 천장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기어가듯 발을 뗀 후에야 조금씩 옮길 수 있었다. 한번 숨을 참으면 기껏해야 5cm씩 갈 수 있을 만큼 무거웠다. 온몸에 땀이 흘렀고 어깨는 이미 멍든 것처럼 책장을 올려놓지 않아도 은은한 통증이 깊어지고 있었다. 목표 지점의 반 정도까진 그냥 원래 자리로 옮겨놓을까? 수백 번 고민했지만 그조차도 눈치가 보여 말하지 못하고 낑낑댔다. 이 짓을 왜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그 사람의 한숨 소리가 어깨 위에 올려져 있던 원목 책장보다 무겁고 아팠다.


그리고 거실로 옮겨진 책장.

나는 그 책장을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그 후로도 몇 번 했던 것 같은데, 그 사람과 헤어질 때까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고, 그 집에서 나올 때까지 책장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안방의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그 묵직한 책장.



얼마 전 짧은 열애가 끝났다.

‘끝났다’라고 말하기엔 시작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시작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熱愛'였다. 묵직한 책장만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책장을 볼 때마다 자꾸 어쩌지 못하는 마음에 서글픔이 차오른다. 책장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본 건 그냥, 마음을 좀 어쩌고 싶은 하릴없는 선택이었다.


자다 깨서도 시꺼멓게 나를 바라보는 그것.

혼자서는 버릴 수도, 옮길 수도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