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워서 꺼내보는 과거 연애사(1)

by 표고



2007년이나 2008년이었던 것 같다.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만나던 사람이 있었다. 음악을 하다가 만난 사람이었다. 연애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처럼 해사하게 생긴 신비로운 사람이었는데 당시 실연한 나를 위로하고 싶어 했다. “이제 진짜 혼자야.”라는 말에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아래 생긴 흑심을 잠재워야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는 하얗고 해사했고 연애 같은 건 하지 않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쓰다듬은 사건(?)이 있고, 몇 주 지났을까. 한밤 중에 느닷없이 그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휴대폰 너머로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가 났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 옥상에서 전화하는 거라던 그. 후- 담배연기를 내뿜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밤하늘에 흩어지는 연기와, 하늘을 보며 정처 없이 걷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담배를 피우던 그의 모습은 일본 청춘영화 같았다. 하얗고 해사해서.





자꾸 네가 생각나네.
아무래도 좋아하는 게 아닌 가 싶어.




진짜 그때 그 옥상, 그 MP3



지금 생각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완벽한 고백이었다. 왜 나를? 의구심이 들었지만 두근대는 심장은 내가 어쩌지 못했다. 우리는 밤을 꼴딱 새워 통화하다가 첫차를 타고 홍대입구역에서 만났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제야 취미가 뭔지, MP3에 어떤 음악이 있는지, 어디에 사는지, 왜 좋은지를 물었다. 서교동 이리카페였다.



세상, 이렇게까지 또렷하게 생각날 일인가.

거의 20년 전 일인데 그날 그 사람의 표정까지 기억난다.



그 사람은 목소리가 매우 낮았고, 노래를 매우 잘했고, 사진을 매우 잘 찍었고, 미적 감각이 매우 뛰어났으며,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했다. 유학 같은 건 갈 수 없는 가정환경이었는데도 외국에서 살다 온 친구들보다 영어를 잘했으며,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성적이 잘 나왔다. 신비로운 건 나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에게 그런 것이라,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와 많이 달랐다. 가장 달랐던 점을 꼽자면, 그는 한 집의 가장이었다는 점. 그에 비하면 나는 집안도, 성격도 지극한 평범했고 그저 철없는 학생이었다. 그는 자신이 똑똑한 걸 잘 알았다. 그렇게 똑똑한데도 더 배울 수 없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어서 종종 절망했다.



진짜 청파동 그 거리


그러던 어느 여름밤, 청파동에서 그는 이대로 한강까지 걸어가 죽어버리겠다고 나와 반대편으로 걸었다. 새벽이었다. 가로등불과 우리뿐이었다.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그의 옷깃을 잡고, 그는 뿌리치고. 그럼 같이 죽을 거라고, 같이 걷자는 말에 아무 말 없이 따라갈 수 없는 더 빠른 걸음으로 저 멀리 묵묵히 걸어가는 그.



계속 가 그럼!
난 여기 누워서
너보다 더 빨리 차에 깔려 죽을 거야.




나는 냅다 대로 한가운데 누워버렸다. 아마도 그는 진짜 괴로웠던 것 같다. 나를 그대로 눕혀놓은 채 한참을 오지 않았다. 다행인 건 차도 오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진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누워있는데 그가 위에서 나를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러다 진짜 죽는다.


영화 <노트북>을 다시 보며 좀 울다가, 괴로워서 뭐를 계속 좀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가, 어릴 적 낭만이나 써볼까, 기억을 되살려봤다. 그래서 그렇게 죽고 못살던 그와 왜 헤어졌냐고 묻는다면....

얘기하기 싫다. 이 페이지에서는 낭만만 얘기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