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제임스우드>을 읽고

by 표고


#1. 이 책은 제임스우드라는 비평가의 글이다. 비평이라는 게 이렇게 시적이고 멋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라는 작업이 왜 멋진 일인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2. 글쓰기란 진지하게 관찰하여 그것을 구원하는 것.

관찰한다는 것은 구출하고 구원하는 것이며 삶을 그 자신으로부터 구해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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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국이란 아주 작고 세세한 것들에 최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들을 우리 곁에 불러오는 방식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보상해 주는 곳이라는 개념이 퍽 마음에 든다. 어쩌면 천국이란 진지한 관찰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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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변 세상에 기울이는 것과 같은 세심한 주의를 죽은 자들의 그림자에도 기울인다면, 그들을 더 깊이 바라보고 변모시킴으로써 되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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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 작고 사소한 것들이 다시금 우리에게 말을 건다. 사시나무와 라일락과 장미, 박하 향의 전율. 그리고 짧은 입맞춤.




내가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하던 때는 21살 무렵이었다. 독서나 글쓰기와 친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쓰고 싶었다. 글을 쓰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인생이 하나의 작품으로만 보여서 좋았다. 마음을 많이 쓰지 않아도 돼서 내 삶도, 그들의 삶도 한 발치 떨어져서 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삶이 행복할 땐 쓰고 싶은 욕구가 덜 했지만 불행할 땐 감성과 사건을 내 얘기가 아닌 것처럼 각색하고 예쁜 단어로 표현하고 나면 덜 아팠다. 현실의 내 슬픔은 곧 죽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의 연속이었으나, 뭐라도 쓰고 나면 왠지 그 슬픔이 인생에서 꼭 겪어야만 하는 가치 있는 경험이라도 된 듯 빛이 났다.

또,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예를 들어, 내가 사랑하는 A의 목 언저리에는 까만 점이 있다고 치자.



사랑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가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어도, 그와 둘이 앉아 있어도 이상하리만치 목 언저리에 있는 까만 점만 보였다. 유난히 광이 나는 점도 아니었고 모든 사람들의 몸 어딘가에 하나쯤 있는 평범한 점이었다. 어떤 날엔 A가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덜미의 점에만 집중하곤 했다.
이렇게 목 언저리의 점은, 목덜미의 점이 되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그 점을 관찰하던 어느 날, 나는 A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점이 먼저인지 A가 먼저인지는 모른다.
목덜미의 점은 그의 흰 피부 위에 있다. 그 점이 놓인 흰 살결은 부드러운지 거친지를 상상해 본다. 몸엔 그런 점이 몇 개나 있을지 상상해 본다. 이제 그 점은, 희고 부드러운 살결 위에 있는 점이자, 그의 몸뚱어리 상단에 위치한 귀여운 점이 된다.
그의 몸에 있는 모든 점들을 목덜미의 그 점이 진두지휘하고, 알 수 없는 힘으로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내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점들이 사랑해 달라고 먼저 꼬신 것이다.



그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점은 그저 내 변태적 상상의 선두에 있는 ‘점’으로, 글로써 남는다. 그와 이루어진다면, 가장 먼저 입 맞출 그의 신체 부위가 된다.

이렇게 아무도 집중하지 않는 점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나는 이 점과 이 점으로 인해 파생되는 상상으로만 공책 한 권을 채울 수 있다.

이런 과정이 내겐 글쓰기다. 아주 멋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예는,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위 관찰의 결과물로써 글쓰기다.


사람을 싫어하는 일에도 품이 든다. 그렇기에, 싫어하면서도 싫어하기 싫은 마음이 공존한다.
나는 소음을 내는 사람이 싫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선 더더욱 그렇다. 캐비닛을 굳이 멀리에서 놔버린다든가, 슬리퍼 끄는 소리의 데시벨이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높다든가, 하품을 만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소리 내서 한다든가, 하는 습관들이 싫다. 주변에 이런 싫은 습관을 가진 사람을 싫어하다가, 싫은 감정도 스트레스가 되는구나 싶을 때, 나는 그가 나이 먹도록 이런 습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상상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집은 항상 고요했고, 퇴근하신 부모님은 그의 저녁은 챙겼지만 그가 걸을 때, 발꿈치가 아닌 다른 부위부터 닿는 건 아닌지 세심하게 살필 시간이 없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그는 어둠이 무서웠다. 혼자 자는 것이 두려워 먼저 잠든 엄마 곁에 베개를 들고 가 잠을 청하는 날이 많았으나 그럴 때에도 그의 부모는 그가 어디에서 잠드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그는 혼자 있을 땐 적막을 깨기 위해, 가족들이 있을 땐, 한 번이라도 더 와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소음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싫어하지 않기 위해 상상한다.

(물론 그래도 싫은 경우가 더 많다.)





#2. 세상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는가.

그는 이해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한 적절한 분석을 방해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단순한 이해는 유용하고 필수적이긴 하지만 인간의 정신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능력이며 가장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려 한다.”


이해란 무엇일까.

우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수많은 우주와 수많은 태양 중 우리는 1개의 태양만을 보며 산다. 수십억 광년을 달려온 별, 이미 소멸했을 수도 있는 그 별의 빛을 보며 산다. 고작 100년 남짓 사는 내가, 그중 몇 십 년밖에 살지 못한 내가 “이해 안 돼.”라는 말을 해도 되는지 겸손해진다. 어쩌면 우리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전시를 가면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 가는 작품이 있다. 이해하기 위해 오디오 해설 등을 참고해도 되지만 나는 그 모호한 느낌이 드는 작품을, 그리고 그 느낌을 매우 좋아한다. 물론 설명하기 힘들어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하나, 알 수 없는 느낌을 있는 단어를 골라 설명하는 과정도 좋고, 영영 혼자 좋아도, 좋은 건 좋은 거다.

나는 그 좋은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주변 환경과 그걸 맞닥뜨렸을 때의 내 기분을 묘사하는 방법을 선택하곤 한다. 그 묘사라는 건 그냥 이런 거다.

좋을 땐 흐린 하늘도 맑아 보이고,

같은 비가 와도 슬플 땐, <낭만에 대하여(최백호)>를 듣고 싶지만,

좋을 땐 <사랑밖에 난 몰라(심수봉)>를 듣고 싶은 그런 기분들을 그냥 기록하는 것.


중요한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해되지 않는 채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되는 게 인생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주 작은 미물. 아주 하찮은 인간 1 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