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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 소년, 뉘집 아범인지...

잘 생겼다!!!

by 글터지기

여행은 준비할 때가 가장 행복한 법입니다.


여행지에서 하고 싶은 일을 상상하고,

그곳에 맞는 옷과 음식을 챙기고

캐리어에 하나씩 담아 놓을 때 느껴지는 설렘.


제가 그 기쁨을

흰머리 소년과 같이 누리고 있습니다.


캐나다에 있는 '말로만 효녀'(동생)에게

손주 손녀를 보러 간다는 게 정해지자

자잘하고 사소한 준비물이 생기고 있습니다.


비상약을 챙겨야 하고,

비행 체력을 고려해 미리 진료 예약을 하고,

여권이 없으니 사진을 찍으러

스튜디오에 함께 발걸음을 했습니다.


사진을 찍기 전에 머리를 만져보고,

촬영장 의자에서 자세도 이리저리 취해보고

연습 스냅사진도 찍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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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 주름이 참 많이 느셨네...

이제 아들놈 말 안 듣는다고 화를 내셔도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아마 흰머리 소년은 사진을 이렇게

공들여 찍어 본 일이 없을 겁니다.


부자간의 대화를 엿들으시던

스튜디오 원장님이 '이건 서비스'라며

촬영한 걸 여러 컷에 모아 한 장에 담아 주셨고,

카톡으로 이미지도 보내주셨습니다.

환하게 잘 나온 사진이라며 웃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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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민원실에 들려 여권 신청을 합니다.

1년 단기 여권을 신청하는데

담당자께서 10년 여권을 권합니다.


단기 여권은 입국이 안 되는 나라도 있다고.

부랴부랴 동생에게 전화해서

괜찮은지 물어보고 절차를 마무리했습니다.


그 과정을 조용히 사진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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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다가 문득 스친 생각,

영정 사진으로 쓰이는 건 아닌가.

흰머리 소년 마음도 행여 그런 생각이었을까.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습니다.


그 생각 자체를 곧 털어 냈습니다.

언젠가 사진을 선택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흰머리 소년이 가장 환하게 웃는 사진으로 택할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진은 여권을 위한 것일뿐,

지금의 사진이자 함께 살아가는 순간입니다.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현상한 사진을 액자에 담아

TV 선반 앞에 예쁘게 올려놓았습니다.


가족 단톡방에 사진을 보내고

'아버지 사진 잘 나왔어요' 했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습니다.


한 시간 있다가 '우리 집 서승사자'(딸)가

'할아버지 정말 젊게 나왔어요' 하니

'고맙다~' 하십니다.


이런 편애가 가득한 흰머리 소년 가트니.


"뉘집 아범인지 자~~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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