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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끼 한 벌과 들뜬 흰머리 소년

캐나다에 다녀올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by 글터지기

오늘 시 외곽에 위치한 매장에 납품을 하는데

사장님과 직원들이 일명 '할머니 조끼'를

진열하면서 '이거 따뜻하고 괜찮네' 합니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집에서 편하게 입기 좋겠다 싶었습니다.

양쪽에 주머니도 있으니 휴대폰 넣기 좋겠고,

흰머리 소년께 딱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 구입해서 퇴근했습니다.


"아버지, 잠시 나와보세요.

이거 편안해 보여서 하나 사 왔는데

집에서 입기 편하실 거 같아요.

한 번 입어 보세요."


"이거 노인들이 많이 입던데

입어 보니 편하고 좋다." 하며 웃으십니다.

그래서 인증숏을 하나 남겼습니다.


KakaoTalk_20251112_222237716_01.jpg


사실 대화의 시작을 이걸로 해야겠다는

간사한 사심이 들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아버지, 앉아 보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순간 '너 뭐 사고 쳤지?' 하는 눈빛으로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식탁에 앉으십니다.


"아버지, 여권 있어요?

00 이가 며칠 전에 와서 할아버지 모시고

고모한테 한 번은 다녀와야 한다며

일정을 조율하고 있어요.

컨디션이 다녀오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다시 한참 바라보시던 흰머리 소년은

눈가가 이미 벌겋게 달아오르셨습니다.


"내가 몸이 이래서 갈 수 있겠나..

혼자 가는 거는 못 가는 거라고 생각하지..

그런데 00 이가 같이 가면 갈 수 있지 않을까.."


말씀하시는 내내 자꾸 눈가를 훔치십니다.


"그렇게 동생이 보고 싶으세요?"

"네 동생보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


그간 동생네 손주 손녀들과 매일 통화는 하지만

내심 많이 보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조카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주 돌봐오셨으니

더 애틋했었나 봅니다.


사실 며칠 동안 캐나다의 '말로만 효녀'(동생)와

'우리 집 저승사자'(딸)과 이것저것 논의하여

대략 일정을 잡아 둔 상태이고,

항공 스케줄 일정을 알아보는 중이었습니다.


괜히 간다고 말씀드렸다가

못 가는 일이 생기면 더 속상해하실까 봐

구체적인 사항이 정해지기까지

숨겨왔는데 미리 말씀드려

운동도 하셔야 하고, 쌀쌀해진 날씨에

건강관리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나니 저도 마음이 좋습니다.

흰머리 소년도 조끼를 입은 채로 웃으십니다.


이제 비행기도 타 보시겠다며 농을 건넸습니다.

젊었을 때 타봤다며 우기시는 흰머리 소년.


한 번의 외출도 큰일처럼 여겨져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멀리 가실 수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마음.


"이제 건강부터 잘 챙기시고 운동도 좀 더 하세요.

추운데 나가서 오래 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항공권 다 아버지가 물어내셔야 해요." ㅋㅋ


"그런데 이 조끼 따뜻하고 좋다.."

딴소리를 하십니다. 하하하


따뜻하고 평온한 저녁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 해 드렸습니다.


"이제 아들 말 좀 잘 들으면 되겠네..

자다가도 떡이 나오게.."


살그머니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가십니다. 하하하


ChatGPT Image 2025년 11월 12일 오후 10_29_22.png


*에필로그

흰머리 소년 관련한 글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연 이틀 쓰고 있습니다.


글을 기다리고 있을 '말로만 효녀'(동생)에게도

알려줘야겠고, 지금의 이 마음을 남겨 두는 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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