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처럼, 아니 '귀한 손님'처럼

갔다 온 사람 '둘'에게는

by 글터지기

갔다 온 사람 둘이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두 사람이 인연을 잇는 일이 아니라고

지난 글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저에게는 아이들과 아버지가 있고,

그녀에게도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우리'보다 먼저

'아이들'을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내 자식처럼 생각하면 된다'라고.

하지만 저는 그 말에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습니다.


내 자식처럼이라는 말은

자칫 익숙함이라는 이름으로

경계를 흐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이 앞서고, 조언이 빨라지고,

선의라는 얼굴을 한

간섭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로 생각해 봅니다.

그녀의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

우리 집에 찾아온 아주 귀한 손님이라고.


귀한 손님에게는

함부로 묻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고,

함부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다만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말보다 태도를 먼저 내보입니다.


오히려 내 아이보다 더

조심하고, 더 아끼고, 더 단정하게

마음을 다듬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그녀의 아이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저녁 시간을 아이에게 맞춰

함께 식사를 할 수 있겠느냐고요.


그렇게 저녁에 만나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특별한 말도, 거창한 이벤트도 없었습니다.


ChatGPT Image 2026년 1월 23일 오후 04_24_47.png


그저 식사를 함께 하고,

덕담 같은 잔소리가 조금 섞이고,

시간을 함께 나눈 소중한 자리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부재라는 것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당황스러운 순간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간을

다시 채우려 애쓰지는 않습니다.


대신 옆에 앉아

같은 식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덜 불편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조용히 놓아둘 뿐입니다.


이혼한 남녀가 만나는 일에는

언제나 '아이'라는 숙제가 따라옵니다.


그 '귀한 손님'을 소중하게 대하는 게,

결국 내가 지금 만나는 '갔다 온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 씀이 아닐까.


피할 수 없는 문제라면

서두르지 않고, 흉내 내지 않고,

정답을 가장하지 않는 것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의 식사 자리도

그녀와 자녀를 존중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아이에게는 마음의 진심을 건네는,

그녀에게는 아이도 같은 마음이라는 신뢰를,

잘하려는 마음보다

그저 곁에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었던 자리.


어쩌면 그거면 충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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