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와 캐나다편
흰머리 소년께서는 종친회에서 한자리하셨던 분입니다. '한자리'라고 하면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 표현 같지만, 실제로는 명절만 되면 외출복을 꺼내 입고, 시간을 분 단위로 계산하며 분주해지는 자리입니다.
오후 1시 모임이라
"아버지, 10시에 출발하면 됩니다."라고 말씀드렸건만, 아침 8시부터 이미 외출복을 갖춰 입으시고 거실을 순환 운동 중이십니다.
"조금 더 일찍 가는 게 낫지 않겠냐?"
"길 막히면 어쩌려고 그러냐?"
"명절인데 차 많을 텐데…"
말씀은 차분하신데, 발걸음은 전혀 차분하지 않습니다.
결국 저는 한 시간 일찍 출발했고, 우리는 한 시간 먼저 도착했습니다. 약속 장소는 흰머리 소년과 친한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닭갈비집.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흰머리 소년의 화두는 단 하나였습니다.
"이번에 캐나다를 다녀왔다."
손녀가 모시고 갔다는 이야기, 딸네 집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춥지도 않았고, 살도 빠졌고, 건강하니까 다녀온 거라는 이야기, 그리고 결정적으로 "애들이 효녀"라는 대목까지.
오늘 종친회 모임의 주제는 사실상 '캐나다 견문록'이었습니다.
형님들, 삼촌들,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아도 흰머리 소년의 마이크는 꺼지지 않습니다. 애국가를 4절까지 제창하고 나서야 넘버 투 자리에 앉은 흰머리 소년께 어르신들이 한마디 던지십니다.
"그래도 형님이 건강하니까 좋네요."
그 한마디를 듣고 나서야 잠잠해지셨지요. 기분 좋게 맛난 닭갈비를 양껏 드시고, 이것저것 종친회 안건을 논의하고 자리를 마무리했습니다.
사실 요즘 제 아래 세대는 이런 모임에 잘 오지 않습니다. 어릴 적에 한두 번 인사하고 얼굴 본 게 전부라 길에서 마주쳐도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매년 참석하면서도 궁금해집니다. 조선시대에 족보를 가진 집은 7%에 불과했다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모두가 '무슨 파, 몇 대 손'인지.
무슨 무슨 '정'씨, 무슨 파, 몇 대 손, 장남, 누구의 아들. 이게 종친회에서 저를 설명하는 명함입니다.
나이가 오십을 넘었어도 여전히 막내 축에 속해 잔심부름을 도맡는 역할. 그래도 저는 매년 두 시간 반을 운전해 모시고 가고, 또 두 시간 반을 운전해 돌아옵니다.
이게 무슨 대단한 효도는 아닐 겁니다.
어쩌면 그냥 습관이고, 어쩌면 그냥 명절 풍경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닭갈비집 한쪽에서 캐나다 이야기를 반복하며
"그래도 내가 건강하니까 다녀왔지. 올해 말에 또 한 번 가려고." 하시는 흰머리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족보에 적히는 건 '몇 대 손'이라는 글자 몇 줄이지만, 사실 그 몇 대 손이라는 걸 믿는 저도 아니지만, 제가 진짜로 물려받는 것은 그 들뜬 마음, 자랑하고 싶은 건강, 그리고 아직은 어른들 앞에서 반듯이 앉아 있는 그 뒷모습이 아닐까 하고요.
언젠가 종친회 명부에 흰머리 소년의 이름이 먼저 사라지는 날이 오겠지요. 어쩌면 제가 먼저 사라지는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날에는 그저 '몇 대 손'이 아니라 '캐나다 자랑을 그렇게 하시던 분의 아들'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명절마다 피곤함을 무릅쓰고 운전대를 잡는 이유는 어느 집안 몇 대 손이어서라기 보다, 저는 그저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도 피곤했지만 신나게 말씀을 나누시던 흰머리 소년 모습에 그저 감사한 날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