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소년의 결실과 풍요의 계절

봄이 왔습니다.

by 글터지기

결실의 계절은 단연코 가을이라 배워왔습니다. 풍요의 상징도 늘 황금빛 들녘이었지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화창한 봄날에 우리 집에는 난데없이 ‘풍요의 계절’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계절을 앞질러 온 작은 시장 하나가 거실에 차려진 셈입니다.


겨우내 집 안에서 겨울잠을 주무시던 흰머리 소년께서 슬슬 바깥나들이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집 앞 공원 산책로에는 추위에 자취를 감췄던 뻥튀기 장수 아저씨가 다시 등장했고, 직접 키운 나물을 판매하시는 할머니들도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햇살은 부드럽고, 사람들 얼굴에는 생기가 돕니다. 그 장면만 상상하면 참으로 정겹고 평화롭습니다.


문제는 그 정겨움이 고스란히 우리 집 식탁으로 옮겨온다는 데 있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오니 식탁 위에 귤 한 봉다리가 또 얹혀 있습니다. 분명 지난달에, '귤도 이제 끝물이라 이게 마지막이야'라고 단언하셨던 분이 흰머리 소년이셨습니다.


"아버지, 귤 끝물이라면서요?"

"이거 맛있어."

설명은 짧고, 표정은 당당하십니다. 계절은 끝났어도, 맛은 끝나지 않았다는 논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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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문을 열어보면 봄동이 두 통이나 들어 있습니다. 쌈장 찍어 먹으면 지금이 제일 맛있다며 사 오신 겁니다. 흰머리 소년 방 앞에는 봉지째 쌓인 과자도 보입니다. 제가 수차례 '저는 과자, 과일 잘 안 먹습니다'라고 말씀드렸지만, 늘 결론은 같습니다.


"너 먹으라고 사 왔다."

그러고는 정작 본인께서 제일 맛있게 드십니다.


오늘 아침에는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가족 단톡방에 카톡이 울립니다. 흰머리 소년의 소식입니다. 일단 보시지요. ㅋㅋㅋ


집에 드셔야 할 사과가 떨어졌는데 마트에서는 비싸다고 시장에 택시를 타고 다녀오신 모양입니다. 집에 들어올 '마음지기'에게 또 사 오셨다고 혼이 날까 봐 미리 선수를 치시는 게 아닐까. 하하하.


우리 집 저승사자(딸)는 '이걸 어떻게 들고 오셨대요?' 묻습니다. 답은 간략하지요. '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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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웃음이 나옵니다. 조금 지나면 한숨도 섞입니다. '이걸 다 언제 먹나' 계산기를 두드리게 됩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봄날의 과일과 채소, 과자 봉지들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산책길에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인사, '이거 한번 맛봐요'라는 노인들의 한마디, 그 속에 섞인 흰머리 소년의 호기심과 생기. 집 안에 쌓여가는 것은 귤과 봄동이 아니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삶의 기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울에는 고요가 집 안을 채웠다면, 봄에는 봉지 소리와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가 집을 채웁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말없이 귤을 하나 까 봅니다. 맛은, 솔직히 괜찮습니다. 풍요의 계절은 꼭 가을에만 오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누군가의 두 발이 다시 바깥을 향해 걷기 시작할 때, 그 집에는 이미 봄빛 풍요가 찾아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택시 타고 천 원 싼 사과 사는 것보다 마트에서 5백 원 비싼 사과 사는 게 이문이라고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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