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배부르게 먹고, 웃고, 묻고, 뜨끔해졌습니다.

by 글터지기

명절은 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연휴가 오기 전에는 하고 싶은 일들이 줄을 서 있고, 막상 지나고 나면 기억나는 건 '왜 이렇게 빨리 끝났지?' 하는 허탈함뿐입니다. 1년에 딱 두 번 있는 3일의 휴식인데, 쉰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해낸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다들 비슷하시지요?


그래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무 일도 없던 명절은 아니었습니다.


흰머리 소년과 종친회에 다녀오고, 캐나다에서 온 조카가 집에 머물고 있고, '우리 집 저승사자'(딸)는 동생 출국 전에 얼굴 한 번 보겠다며 집으로 왔습니다. 명절이란 게 결국 사람을 모으는 장치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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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지기가 보내준 제수용 전과 잡채, 과일, 갈비에다가, 춘천에서 포장해 온 닭갈비까지 더해 근사한 점심상을 차렸습니다.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가정식 코스요리'라 자부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너무 든든하게 먹은 탓인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배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명절의 진짜 후유증은 피로가 아니라 과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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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흰머리 소년은 쉬시라 하고, 조카와 저승사자, 마음지기와 함께 분위기 좋은 북카페로 향했습니다. 요즘 유행이라는 '두쫀쿠'를 하나씩 맛보는 모습을 보며 저는 묵묵히 패스했습니다. 저는 밥이면 충분한 사람입니다. 유행은 늘 저보다 한 박자 빠릅니다.


카페에서는 자연스럽게 노트북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승사자는 오래된 노트북을 바꾸고 싶다면서도 반도체 값이 올라 가격이 천정부지라며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조카는 전자제품 박사처럼 스펙을 비교하고, 가격을 따지고, 누나에게 조언을 쏟아냅니다. 그 모습이 제법 든든해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어느새 자기들끼리 세상의 언어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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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불쑥, 저를 향해 질문이 날아옵니다.

"아빠는 글 쓴다고 하더니 언제 책이 나오는 거예요?"

잔잔하던 호수에 돌 하나가 정확히 떨어졌습니다.


블로그 주소를 보내줘도 한 번도 읽지 않는 아이들과, '잘 하고 있지?'라고만 묻는 마음지기 덕분에 저는 마음 편히 글을 써왔습니다. 응원은 하지만 간섭은 하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더 뜨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2주째 퇴고를 미루고 있습니다. 쓰는 건 열심히 하면서, 다듬는 건 슬그머니 뒤로 미루고 있었지요.


명절이 별일 없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보니 제 안에서는 작은 점검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한마디는 원고지 위에 남겨진 숙제 같았고, 북카페의 따뜻한 공기는 '이제는 정리하고 다시 시작해야할 때'라고 등을 떠미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오늘 저녁에는 조카와 함께 '왕과 사는 남자' 영화를 예매 했습니다. 이걸 딱 보면서 연휴를 마감하는 마음을 갈무리 해보려고 합니다. 이왕 쉰 거 깔끔하게 심야 영화를 보러 갑니다. 하하하


이번 명절, 저는 크게 쉰 것도 아니고 크게 한 일도 없습니다.

다만 배부르게 먹고, 웃고, 묻고, 뜨끔해졌습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정말, 퇴고를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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