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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거처가 되는 공간에 대하여

그리움이 남은 공간

by 글터지기

최근 EBS, 클래스 E, 정여울 작가의

『나의 첫 번째 에세이 글쓰기』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지난 글이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의 아킬레스건은?' 등은

강의의 숙제기도 했습니다.


어제 강의의 주제는

'영감을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처럼

마음의 거처가 되고,

나 자신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장소.

그런 공간을 떠올려보고,

가능하다면 다시 찾아가 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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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도 그런 장소가 하나 있습니다.

강원도 인제에서 속초로 넘어가는 국도변, '장수대'입니다.


젊은 시절,

전문대학 총학생회 부회장을 하던 때였습니다.

동기 몇 명과 함께 농촌봉사활동 차 그곳을 찾았고,

등산로 주변에 방치된 쓰레기를 줍는 일을 했지요.


요즘은 고속도로가 뚫려

잘 다니지 않는 길이 되었지만,

당시엔 설악산을 넘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한계령 고갯길 위였습니다.


며칠 뒤,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해 급히 대피하게 되었고

우리는 장수대 대피소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한 사람.

등산을 왔다는,

월남 참전 용사 출신의 아저씨였습니다.

소대장으로 참전했었다는 그는

우리 일행의 철수를 도와주며

늦은 밤까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부하가 다치는 모습을 보면,

적이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분간이 안 되더라.”

그의 이 말은 지금까지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화면 캡처 2025-07-09 055517.png


하지만 그 여름,

장수대가 제 기억에 오래 남은 진짜 이유는

그날 밤 저를 간호해 주던 한 소녀 때문입니다.


몸에 열이 올라 텐트 안에 누워있던 제 곁에서

밤새도록 물수건을 갈아주던 그녀.


봉사활동 중

설악산 개울가에 함께 발을 담그며 웃던 모습,

조심스레 물을 건네던 손길,

그리고 말없이 내 옆을 지키던 그 따뜻함.

그 소녀는 그렇게 제 첫사랑이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장교가 되었고,

그녀는 간호사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첫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한계령을 넘는 길에 나설 때면

나는 무심코 장수대에 들르게 됩니다.


그때의 정자가 아직 남아 있을까,

그 계곡물은 여전히 맑고 차가울까,

국도변 초록은 여전할까,

괜스레 확인하고 싶어 집니다.


그곳엔 지금은 사라진 시간들이

조용히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아서요.

내가 장교가 되겠다고 결심하던 순간,

밤새 열 오른 이마 위로

조심스레 물수건을 갈아주던 그 손길,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주던

한 소녀의 따뜻한 눈빛.


비록 첫사랑은 지나갔지만,

그 여름의 기억은 제 마음 어딘가에

여전히 고요한 안식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곳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모두, 그리운 장소 하나쯤 떠 올려 보는

하루가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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