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남은 공간
최근 EBS, 클래스 E, 정여울 작가의
『나의 첫 번째 에세이 글쓰기』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지난 글이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의 아킬레스건은?' 등은
강의의 숙제기도 했습니다.
어제 강의의 주제는
'영감을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처럼
마음의 거처가 되고,
나 자신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장소.
그런 공간을 떠올려보고,
가능하다면 다시 찾아가 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장소가 하나 있습니다.
강원도 인제에서 속초로 넘어가는 국도변, '장수대'입니다.
젊은 시절,
전문대학 총학생회 부회장을 하던 때였습니다.
동기 몇 명과 함께 농촌봉사활동 차 그곳을 찾았고,
등산로 주변에 방치된 쓰레기를 줍는 일을 했지요.
요즘은 고속도로가 뚫려
잘 다니지 않는 길이 되었지만,
당시엔 설악산을 넘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한계령 고갯길 위였습니다.
며칠 뒤,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해 급히 대피하게 되었고
우리는 장수대 대피소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한 사람.
등산을 왔다는,
월남 참전 용사 출신의 아저씨였습니다.
소대장으로 참전했었다는 그는
우리 일행의 철수를 도와주며
늦은 밤까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부하가 다치는 모습을 보면,
적이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분간이 안 되더라.”
그의 이 말은 지금까지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름,
장수대가 제 기억에 오래 남은 진짜 이유는
그날 밤 저를 간호해 주던 한 소녀 때문입니다.
몸에 열이 올라 텐트 안에 누워있던 제 곁에서
밤새도록 물수건을 갈아주던 그녀.
봉사활동 중
설악산 개울가에 함께 발을 담그며 웃던 모습,
조심스레 물을 건네던 손길,
그리고 말없이 내 옆을 지키던 그 따뜻함.
그 소녀는 그렇게 제 첫사랑이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장교가 되었고,
그녀는 간호사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첫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한계령을 넘는 길에 나설 때면
나는 무심코 장수대에 들르게 됩니다.
그때의 정자가 아직 남아 있을까,
그 계곡물은 여전히 맑고 차가울까,
국도변 초록은 여전할까,
괜스레 확인하고 싶어 집니다.
그곳엔 지금은 사라진 시간들이
조용히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아서요.
내가 장교가 되겠다고 결심하던 순간,
밤새 열 오른 이마 위로
조심스레 물수건을 갈아주던 그 손길,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주던
한 소녀의 따뜻한 눈빛.
비록 첫사랑은 지나갔지만,
그 여름의 기억은 제 마음 어딘가에
여전히 고요한 안식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곳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모두, 그리운 장소 하나쯤 떠 올려 보는
하루가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