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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하여

물리치료사의 몸 이야기(죽음의 과학)

 모든 사람이 가진 동일한 진리가 있다면 출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이다. 역사상 많은 이들이 이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가능한 사람은 없었다. 신분이 높은 자도, 그렇지 못한 자도 세상에서 가진 제일의 평등이 죽음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죽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쉽게 생각해 보면 모두가 정해진 결말을 가지고 있다. 끝을 알고 걸어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하지만 이를 인지하고 가는 이가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았다. 생각보다 주위에 있는 것 같지만 의외로 나에게선 멀 것이라 생각하는 죽음. 이 현실을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죽음이란 세포의 죽음을 의미한다. 즉 유기물이 무기물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평생에 생성과 죽음을 반복하는 세포가 더 이상의 재생을 하지 못한 채 유기체 전체의 소멸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 관점은 과정을 설명하기에 실질적인 확인이 불가하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주로 아는 내용이 바로 의학적 혹은 법학적 개념이다. 이는 사람의 사망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폐와 심장 기능의 정지, 동공의 확대 고정 그리고 뇌 기능의 소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이는 과학적 의미보다는 규범적 평가에 가깝다. 왜냐하면 법적인 측면에서 사망을 인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만 인정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이렇게 말해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단어 하나를 이야기하는 순간 이해가 쉬워진다. 바로 ‘뇌사’이다. 의학이 발달한 초기에는 심장과 폐가 멈춘다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의학 기술은 발전하였고 중요도는 뇌에게 넘어갔다. 사실상 뇌의 죽음을 사망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등장한 심폐기는 사람이 기능을 잃어가는 심장과 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게 해주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생명 연장의 방법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기계로 연명할 수는 없다. 세상 모든 이들이 심폐기를 달고 강제로 목숨을 연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들의 사망 사실을 판정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바로 장기 이식술의 발달이다. 장기 이식은 신선한 장기를 이식할수록 그 성공률이 높아진다. 때문에 새로운 사망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뇌사’이다.
 최초 뇌사의 판정 기준은 심폐사를 동반한 전뇌의 기능 소실로 보았으나 판정 기준을 강화하여 뇌간을 포함한 전뇌 기능의 소실로 바뀌게 된다. 전뇌는 대뇌를 포함하여 인간이 사고하기 위한 다양한 정신 작용을 한다. 이에 반해 뇌간은 사람이 살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생명의 원천이다.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혈액이 돌게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이렇게 뇌사에 빠졌다는 것은 이런 일을 하는 모든 뇌가 죽음에 빠졌다는 뜻이다. 즉 뇌의 죽음은 사람의 죽음과 연결되어진다.

 하지만 뇌사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사람의 죽음을 사람이 판단하기에 완벽할 수는 없다. 찬반이 갈리기도 하고 판단 기준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더욱이 죽음이 윤리, 철학, 종교 등 많은 사회적 가치가 개입하여 학문적으로 계속 연구가 이어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죽음의 의미를 다루는 연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만큼 사람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생물이 생명을 잃는 단순 현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쩌면 사람의 삶이 반짝이는 이유는 죽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원을 그리는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있다. 불멸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끝맺음으로 해피엔딩을 그릴 것 같지만 대부분의 줄거리는 죽지 않을 것 같은 불사의 존재가 죽음을 맞이하며 끝을 낸다. 그만큼 죽음이라는 가치는 삶을 끝내는 맺음의 역할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시사한다. 끝을 향해 달려감을 알면서도 바뀌어 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에 생은 이토록 아름답다. 그래서 더욱이 죽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결하다. 비록 슬픔과 상실을 남기는 단면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살면서 한 번쯤은 눈높이에 맞는 곧은 시선에서 죽음이라는 그 모습 자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루를 닫는 겨울밤. 어두워지면 쏟아지는 감정의 바람 속에서 죽음이라는 결말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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