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를 해도 궁극의 맛으로 그날을 마무리하면 만사오케이!
<블루노트 도쿄>로 마무리 지은 여행 첫날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이 기세를 몰아 둘쨋날도 너무 타이트하진 않지만 알차게, 유익하고 즐겁게! 보내보자꾸나!
들뜬 마음으로 스케줄을 짰다. 나의 예상 스케줄은 이랬다.
아침 일찍 근처 동네 러닝 → 라멘 맛집 방문 → 와세다대학교 방문 및 하루키도서관 →
소세키기념관 → 쿠사마야요이미술관 → 돈까스 맛집 방문
전날 새벽 3시에 일어나 비행기 타러 가고 밤까지 강행군이었던지라 호텔 근처 러닝은 불가능했다.
8시에 벌떡 일어나 아쉬운 마음에 호텔 트레드밀을 잠시 뛰었다.
사실 와세다대학교 구경은 짝꿍이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해서 일정에 일부러 넣게 됐다.
그렇다고 와세다대학교만을 위해 그 동네를 갈 순 없으니 츠케멘, 라멘 거리로도 유명한 다카다노바바역 근처 라멘집 가서 점심 먹고 소싯적에 자주 들렀던 빅박스 건물도 들러주지 뭐. 그리고 나서는 와대 잠깐 들렀다가 메인 일정인 하루키도서관으로 가야지. 그래그래, 근처에 소세키박물관도 최근에 생겼으니 들려주고(내 기준 최근은 5년 정도다) 쿠사마야요이미술관까지 갈까? 살아있는 거장 땡땡이무늬장인 들려야지~ 이게 내 본래 계획의 흐름이었다.
야외러닝은 실패했으나 어쨌든 뛰었으니 배에 기름칠 좀 해볼까! 고소하고 기름진 라멘을 먹으러 출발!
개인적으로 돈코츠 국물 베이스에 어패류를 더한 것을 좋아하는데 딱 그렇게 운영하는 곳이 있었다.
나름 시간 맞춰 갔더니 한 10분 정도 기다렸다가 바로 입장! 짭쪼름하니 기름지고 해산물 특유의 깊은 맛이 있어 맛있게 잘 먹고 나왔다. 진짜 맛있는 라멘은 먹고 나면 사우나 한 것처럼 땀 한 바가지 흘리고 개운한 법! 자, 이제 메인 일정인 와세다대학교와 하루키도서관을 고고!
와세다대학교는 그저 인증샷과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캠퍼스 구경 정도? 확실히 내가 다닐 때랑은 많이 달라졌다. 이제 캠퍼스 안에 스벅까지 입점했구나, 나 때는 늘 편의점이나 생협에서 페트병 음료 마셨는데! 그러다가 새로 생긴 스터디 공간에서 잠시 핸드폰 충전하면서 앉아있는데...
갑자기 메인 일정 두 개가 붕 떠버린 상황. 바보 멍텅구리인 나. 익숙한 장소에서 하는 실수는 참으로 얄궃다. 동선이랑 모든 걸 확인했는데 왜 하필 휴무일은 체크하지 않은 걸까!!!
익숙한 곳을 여행하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나보다. 의외의 지점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나. 소세키기념관도 사실 메인이 아닌데, 어쩌지. 머리를 싸매고 동동거리던 나를 본 짝꿍은 그럼 아예 새로운 곳으로 넘어가자고 했다. 시부야도 좋고 신주쿠도 좋고 롯뽄기도 있고 등등 어디든 새로 넘어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나 : ...그러지 말고 그냥 근처 카구라자카 구경하자. 여기서 저녁까지 먹고 가자.
짝꿍 : 왜? 어차피 볼 거 다 봤으면 그냥 다른 곳으로 넘어가자~
나 : ...안 돼...돈타..가야 돼.
짝꿍 : 읭? 뭔데 그게?
나 : 있어!!! 돈까스집인데 유명하고 맛있대!!! 그리고 여기 수,금,토 저녁장사밖에 안 해!!!! (급발진)
짝꿍 : 아, 그랬구나. (당황) 아... 그래서 못 간다고 했구나. 그래! 그럼 돈까스 먹고 가자.
그렇게 어거지로 소세키기념관과 카구라자카를 대충 돌고 막판에는 빅박스 건물에 들어가 3coin(100엔샵이 아닌 300엔샵)에 들어가 여러 주방 용품을 샀다. 느닷없이 저렴한데 튼튼해 보이는 생활용품들을 구입했다. 그리곤 갑자기 로프트(Loft)를 발견하고는 귀여운 쓰레기들을 마구잡이로 구입했다. 그러다가 짝꿍이 갑분 "와, 일로 와봐! 이건 뭐야?" 라고 외쳤다. 그건 바로 양산 겸 우산인데, 끈으로 묶지 않아도 그냥 접히는 우산이었다!
나 참 나조차 간지럽다고 예상치 못한 곳을 긁어주는 상품이라니! 홀린 듯 구입했다.
우산 구입으로 인해 오픈 시간에 좀 늦었다. 5시 30분 오픈인데 5시 45분쯤 도착했다. 이미 멀리서 줄 서 있는 게 보인다. 우리 앞에는 한 5-6팀이 있었다. 외국인 관광객도 있지만 대체로 현지인들이었다. 무슨 코스요리집이라도 되는냥 줄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아...분명 안에 자리가 많지 않은 곳이겠구나. 테이블 한 바퀴 싹 돌았음에도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던 중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 있던 일본인, 비가 오니 본인 가방을 머리에 이고 버티고 있었다. 그냥 오늘은 돌아갈까 엄청 고민하는 듯 했다. 속으로 그래, 제발 돌아가라며 몇 번이고 되뇌였다. 거의 들렸을 정도로 되뇌였다(실제로 들렸을지도). 그러나 그는 버텼다. 괜히 아까 산 신박한 우산을 쓰고 그를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그 후 바로 그 사람까지 들어가고 우리는 또 하염없이 기다렸다...!!! 1시간 20분 후, 드디어 입.장.
할머니 두 분, 주방에서 돈까스를 담당하는 할아버지 한 분.
돈타는 76년에 개업했으니 잘 모르지만 이분들의 20대부터 70대까지의 인생이 다 담긴 요리가 나오겠지.
느긋하고 여유로운 홀 서빙이 이어지고 천천히 돈까스가 튀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게 안에선 크게 떠드는 사람 없이 묵묵히 돈까스 먹는 소리만 들려온다.
바삭, 오물오물, 쓰읍(미소시루 마시는 소리), 하아~, 음~, 호오~, 바삭바삭
예전 후쿠오카에서 우동명인집에 갔는데 거기 가면 우동 면빨 치는 소리만 들린다고 했다.
설마 꽤 사람 많이 들어가는 식당인데 그렇겠어? 싶었는데 정말 그랬다. 다들 맛있음을 느끼기 바빴다.
그렇다, 여기도 그랬다. 다들 별 대화 없이 묵묵히 돈까스만 먹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도 굴복하지 않고 홀로 온 일본인 남자도 4인 좌식 식탁에 홀로 앉아 딱히 핸드폰을 보지도 않고 오롯이 음식과 마주하며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 사람, 버틸 만 했다. 나라도 절대 포기 못하지...!
특히레까스, 특로스까스, 아지후라이(전갱이 튀김) with 타르타르소스~ 를 주문했다.
미소시루는 미역, 재첩, 돼지고기가 들어간 돈지루 3가지 중 고를 수 있다고 했다.
드라마 심야식당의 단골 메뉴인 돈지루를 골랐다. 우리는 엉켜버린 일정과 긴 기다림으로 몹시 배고팠다.
소복히 쌓인 양배추 샐러드, 그 위에 고명마냥 올려진 새싹과 당근 조금, 5분의 1정도 되는 두툼한 레몬 한 조각, 딱히 기름이 흐르지도 않으나 돈까스 밑에 살짝 깔려진 하얀 종이, 고기와 우엉과 당근이 푸짐하게 든 돈지루, 소스와 같이 곁들여 먹으라며 준 직접 갈아먹는 깨. 익숙한 듯한 상차림, 뭐 돈까스는 이미 우리나라도 참 잘하니 정성스럽고 푸짐하지만 딱히 특이할 것 없는 한상 차림.
근데, 자고로 돈까스란 키츠네이로*가 정석이거늘! 이건 뭐 갈색이라기엔 너무 옅어 좀 진한 노란색 정도였다. 우리는 의아하면서도 이상하게도 기대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돈까스를 한 입씩 베어물었다.
*키츠네이로(きつね色) : 직역하면 여우색인데, 갈색여우의 털과 같은 옅은 갈색을 뜻한다. 요리에서는 튀김이 잘 튀겼을 때 갈색이 난다고 해서 자주 쓰이는 말이다.
에? 어? 와-...뭐야? 뭐야?
오늘의 일정이 꼬인 게 뭔 상관이랴, 오늘 우리는 돈타를 만났다! 이런 생각이 절로 드는 맛이었다.
돼지고기라 생각지도 못할 만큼 부드러웠고 튀김옷 자체도 바삭함을 고스란히 전달하면서도 가벼웠다.
너무 잘 튀겨진 돈까스의 튀김옷은 입천장에 닿으면 살짝 따가움을 주는데(그게 또 맛있게 느껴지지만)
이건 뭐 잇몸만으로도 먹을 수 있을만큼 부드러웠다. 세상에, 내가 알고 있는 돈까스 세계가 끝이 아니였구나! 미쳤다, 뭐지. 돈까스 자체가 너무 맛있다보니 소스 이즈 뭔들이었다! 물론 소스도 맛있었지만, 그 돈까스 자체가 주는 충격과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새삼 타베로그의 평점이 이 세상 까다로움이 아니구나 싶었다. 나에겐 이 곳 5점 만점을 줘도 모자랄 판인데, 거의 뭐 인터넷 미슐랭 수준이다. 아지후라이(전갱이튀김)도 정말~정말~ 부드러웠다. 생선을 많이 잡고 많이 먹는 나라라 그런지, 아님 덴뿌라의 나라라 그런지 뭐냐 너무 잘 튀겨. 그리고 타르타르소스 뭔데~ 너무 잘 어울리잖아! 생선 잡내 1도 안 나고 생선의 고소함과 감칠맛을 응집시켜 튀겨냈다. 이 또한 정성스레 찐노랑에 가까운 색으로. 바삭함과 부드러움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미쳐. 1시간 20분 정도 기다렸는데 그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 오늘 일정이 꼬인 것에 약간의 자괴감을 가졌으나, 아니, 잘했어. 이 모든 게 돈타를 만나기 위함이었어. 그 정도로 합리화화화화 가능할 정도의 맛이었다.
돈타에는 또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일본 전통 방식의 절임채소 한 접시를 준다는 것!
'누카즈케', '츠케모노'라고도 하는데 쿰쿰한 냄새가 난다. 그 정체는 젓갈도 아니고 숙성 채소? 발효채소? 이런 건데 나는 굉장히 좋아한다. 근데 딱히 사먹을 곳도 없고 우리나라 김치 마냥 집집마다 비법이 다르기도 해서 먹을 기회가 없었는데, (아마도) 할미하비가 정성스레 만든 츠케모노를 맛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이거 청국장, 낫토 마냥 호불호가 있는 맛인지라 처음 맛 본 짝꿍은 딱히 좋아하는 맛은 아니라 했다.
마치 돈타의 찬양글이 되버렸는데! (맞말이기도 하다! 하하)
사실 말하고 싶은 건 여행에서 일정이 틀어지는 게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여행에선 어처구니없이 바보같은 실수를 해도 또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덕분에 가까운 어느 날 하루키도서관과 쿠사마야요이미술관에 들렸다가 또 돈타를 갈 날을 기대하고 계획 중이다.
덧. 소세기기념관은 어땠냐고?
나쁘지 않았다. 나츠메 소세키라는 소설가를 좋아한다면 추천한다.
아기자기하고 산책코스로 왔다갔다 하기도 좋다. 뜬금없이 기념관에 소세키 등신대 피규어(?)같은 게 있는데
그게 참 리얼해서 볼거리 중 하나였다. 그 시대 활약했던 다른 문호들의 이야기도 같이 실려 있어
메인이라기보다 들리는 김에 가보는 걸 추천한다.
혹 도쿄여행을 계획 중인 분들을 위해 돈타(とん太)의 타베로그 페이지를 올려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