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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mer Dec 19. 2017

한 가수에 대한 추모

동생과 수많은 이야기들을 짬짬히 밤과 밤 사이 어느 즈음에 주고받았다. 이미 장문의 문자를 통해 의견을 접했던 것에 대한 재조명도 있었고, 또 그 몇달 사이 달라진 의견과 다른 정보에 대한 피드백도 있었다.


어젯밤에 5분간은 샤이니의 메인 보컬이었던 종현 군을 언급하고 우리는 아무의 팬도 아니었지만 그를 어쩌면 조금은 추모했다. 하면서 동생은 특정군에서 자살률이 높다면  케이팝이 한국 엔터테인먼크 사업 중의 하나로 큰 만큼 국가적인 차원에서 아이돌 소속 회사에 대한 조사가 들어가야 하지 않냐고 물었다. 아이돌이란 특정 직업군이 자살률이 특별히 높은지 일단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두번째는 외부의 도움이 있었다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를 묻기도 했지만 동의하지 않았다. 스스로 삶을 접은 청년은 나약하다, 더 참지, 다른 창구를 알아보지와 같은 말을 듣는다. 그것에 대해 언젠가부터는 불만스러웠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라면 (또 대부분의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충동적이지 않다는 통계없는 개인적인 믿음) 그들은 대체로 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쓰며 살기 위해 노력했을 것 같았다. 


어느날 문득 마주한 제 삶에 들어온 문제에 대해 방안을 찾다 최선을 다하여 이만 삶을 안녕하는 행동에 대해 쉽게든 어렵게든 말하고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유서에 남긴 대로, 이제 그만 보내달라, 고생했다 말해달라, 그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결정한 하나의 선택을 받아들여야 할까. 죽어서는 날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아이돌의 유서는 그래서 조금 더 안쓰러웠다. 


2012년도, 아주 오랜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그 중에 한 친구가 자살은 선택이다, 라고 주장했을 때 나를 포함한 다섯명의 인간들은 그 의견에 토를 달았다. 그 중에는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을 견뎌야 하는 직업군의 친구들도 둘이나 있었다. 그 때는 그 친구의 말이 허세같았다.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는 친구의 감정이 삶으로부터 분리된 비현실적인 과잉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5년 동안 자발적인 죽음을 간접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보았다. 타인이 보기에도 스스로 서술하였기에도 그들의 죽음의 이유는 하나같이 모두 달랐지만 삶을 그만둔 도피와도 같이 "나약하다" "루저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이기적이다"라고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죽음들은 삶을 그만두었음에도 그 삶과 동떨어지지 않았다. 살아갔던 이유와 같은 이유에서 죽은 것과도 같이 느껴졌고 실제로 몇은 정말로 그러했던 까닭에 꽤 많은 사람들의 마음안에 그가 생전에 했던 생각들과 언행들로써 남았다.  


죽지않기 위해 노력하는 한 명의 사랑하는 친구의 치료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또 정말로 어느날 갑자기 무엇이 살아가는 길 위에 찾아와 싸우고 슬퍼하다 조각나는 생을 다시 지켜내고 있는 한 선배의 노력하는 삶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후에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읽었던 한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기즈키란 어린 시절의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차고에서 목숨을 끊고, 어린 나이에 그 죽음에 대해 생각하던 화자는 생각보다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종이의 한 면처럼, 때론 같은 연장선 상에 있음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고 했었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같다 ㅋㅋ. 써놓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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