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블랙 미러 시즌1 - 3화 당신의 모든 순간>을 보고
어릴 때 집에서 손바닥보다 큰 바퀴벌레가 집에 출몰한 적이 있다.
이 일이 벌어진 건 내가 초등교 저학년이었던 시절인 것 같다. 당시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방에 들어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고, 시꺼먼게 벽에 붙어있길래 뭐지 해서 유심히 보다 그 녀석이 바퀴벌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혹시나 그 아이가 나에게 달려올까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엄마, 아빠를 호출했다.
부모님은 내 말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신 후, 긴급 가족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의 주제는 누가 저 아이에게 다가가 생을 마감시킬 것인가, 생을 마감시키기 위해 어떤 도구를 사용할 것인가였다. 엄마는 '가서 좀 어떻게 해봐!'라고 아빠를 닦달했고, 아빠는 하얗게 질려 '나 진짜 못하겠어ㅠㅠ'의 대답을 하는 설전이 벌어졌다. 그렇게 여러 차례의 설전 후 두꺼운 잡지를 들고 선봉대에 선 건, 엄마였다. 그리고 엄마는 멋진 장수처럼 그 녀석의 생을 마감시켰다.
10년이 훌쩍 넘어 성인이 되고 난 후, 엄마와 이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된 적이 있다.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세세하게 하지 못하는 편인데 이 날의 기억만큼은 생생하다면서, 그때 아빠 손바닥보다 더 큰 그 녀석의 모습이 끔찍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던 엄마가 나에게 말하셨다.
"네가 어려서 그때 그 녀석의 존재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나 보다. 아빠 손바닥만 하지 않았어. 새끼 녀석보다 조금 큰 정도였지. 네가 너무 무서워서 과장되게 기억되었나 보다"
이처럼 종종 시간이 흘러 내 머릿속의 추억을 꺼내보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 이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은 강렬했던 단편적 사건이 대부분이다. 너무 재미있었거나, 너무 무서웠거나, 너무 힘들었거나, 너무 어려웠던 부분적인 기억들. 나는 이런 부분 기억들을 조합하여 이야기 전체를 설명하고는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이번 여행 어땠어?'라고 묻는다면, 나는 강렬했던 부분 기억들을 조합해 '음.. 힘들었지만 재미있었어', '재미있었지만 불쾌했어' 등의 대답을 내놓는다. 또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모두를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닌, 재미있었던 일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야기해준다. 상대방 역시 진짜 내 여행의 처음과 끝의 '사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상대방 역시 여행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몇 개의 에피소드만을 들려주기를 기대한다.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사진 찍듯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내려놓았다. 그저 내가 겪은 일을 재가공해서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로 풀어갈 수 있는 정도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면, 그 정도로 충분하다. 물론 시험을 칠 땐 사실만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되길 원할 때도 있다. 특히 시험문제에 나온 내용의 답을 전날 어느 책, 어느 부분, 어느 위치에서 보았는지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답'만이 기억나지 않을 땐 사실을 정확히 떠올리지 못하는 내 기억력을 탓한다. (제발!!!!! 단기기억력아, 정확한 사실을 떠올려줘!!!) 하지만 모든 걸 한치의 오차 없이 떠올릴 수 있는 삶은 과연 행복할까?
미래의 세계는 사실만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곳곳에 달린 블랙박스, cctv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정확한 증거들을 눈앞에 가져다준다. 물론 이런 cctv의 사각지대로 인해 사실 유무를 확인하기 어려울 때도 많지만, 미래에는 이런 사각지대조차도 점점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사각지대를 없애는 방법이 사람에게 cctv와 같은 장치를 다는 방법이라면? 그렇게 모든 사람이 '애매한 기억, 미화된 추억'이 아닌 '정확한 사실'만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된다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할까.
가끔 우리는 사실관계를 정확히 따지기 위해 싸우고는 한다. '진짜 정확해? 그거 확실해?'라고 서로를 다그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면 우리는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하루 종일 그 기계만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을까? 당시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 눈동자 움직임 하나까지 정확히 확인하며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모르는 게 약이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저 망각이 사라진 세상에서 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계가 생긴다면, 내 부당함을 증명하겠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사실만을 확인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사실에 집착하게 된 삶에서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때 먹은 음식 맛있었어!'라고 얘기했는데, '너 진짜 맛있었게 먹었는지 확인해보자'라고 하며 당시의 기억을 보며 내 입의 움직임, 인상을 쓰는지의 유무까지 증빙한 끝에 '진짜 맛있었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은 행복할까.
아마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블랙미러 시즌1- 3화 당신의 모든 순간>의 그레인처럼, 나는 분명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됨으로써 과거에 계속 집착하는 삶을 살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