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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뤼메 May 09. 2020

스몰토크가 제일 어려웠어요

"오늘 날씨가 너무 좋네요"를 넘어서는 대화주제를 찾아서


낯가림이 많은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날을 견디는 법


나는 낯가림이 심하다. 그리고 세상에는 나만큼 낯가림이 심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큼 낯가림이 심한 사람과 낯선 공간에 단 둘이 남겨지는 순간을 종종, 아니 생각보다 자주 마주하게 된다. 낯가림이 심한 나와 나만큼 낯 가리는 상대방.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순간을 상상해보시라. 이런 상황의 선택지는 딱 한 가지다. 이 어색함을 더 못 견디는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것. 나는 낯가림이 많은 만큼 어색한 순간을 견디는 것도 어려워하기 때문에 꽤 높은 확률로 먼저 말문을 연다. "오...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하하".


 스몰토크를 해야 하는 시간은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1-2분도 안돼서 종료되는 경우도 있고, 1시간 넘는 시간을 채워야 할 때도 있다. 1-2분 정도라면 날씨 이야기로 충분하지만, 30분이 넘어간다면?


보통 스몰토크의 주제는 보편적인 것들로 이루어진다. 날씨부터 시작해서 음식을 먹고 있다면 그 음식에 대한 평가 (이거 너무 맛있네요? 오랜만에 이 음식을 먹어보네요), 유행하는 소재, 취미 등등. 그런데 이런 보편적인 소재마저 다 떨어져 버린다면? 다시 우리 사이에 적막이 찾아온다면? 그 적막이 5분 이상 지속되고 있다면? 그래서 나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나만의 치트키 하나를 준비해두었다. 준비해둔 모든 소재가 다 떨어졌을 때 마지막으로 꺼내 드는 비장의 카드. 그건 바로 내 휴대폰케이스이다.



스몰토크를 위한

나만의 고군분투기

스웨덴 국민화가 칼 라르손 <Cosy Corner> 작품 명화케이스

휴대폰을 바꾸면서 휴대폰케이스를 사게 되었다. 원래 폰케이스에 큰 관심이 없어 폰을 살 때 기본으로 주는 젤리케이스를 쓰는 편이다. 그러다 선물로 폰케이스를 받을 기회가 생겨 젤리케이스가 아닌 색다른 폰케이스를 고르게 된 것이다. 긴긴 고민 끝에 선택한 건 명화케이스였다. 보통 인기명화케이스는 고흐나 모네 작품처럼 유명화가의 작품이다. 하지만 나는 이 케이스를 사기 전까지 들어보지도 못했던 칼 라르손이라는 화가의 작품을 선택했다. 고흐의 작품으로 선택하려던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화가일수록 주절주절 할 이야기가 많겠다. 대화소재 끊기면 이걸로 이야기해야지!"


내가 상상해본 대화의 형태는 대략 이렇다.

(스몰토크 대화주제가 다 떨어진 후)

- 나 : (폰 케이스를 가리키며) 그런데 혹시 이 그림 뭔지 아세요?
- 상대방 : 어...글쎄요?
- 나 : 이 그림 그리신 분이 칼 라르손이라고 스웨덴 국민화가시래요. 이 분이 그리시는 작품 대부분이 평화로운 전원생활이라고 하시더라구요.
- 상대방 : 아하.. 그래요?
- 나 :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라 그런가 이 폰케이스만 보고 있어도 평화로운 느낌이 들어서 너무 좋더라구요. 혹시 좋아하는 화가 있으세요?

(그 이후 그림 이야기에 이어 아이패드드로잉 등의 취미이야기로 가지치기를 해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겠지만 이 폰케이스를 살 당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초과치를 넘어선 만남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타고날 때부터 붙임성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지 못했으니 내게 남은 건 후천적 노력뿐이었다. 결국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스몰토크에 대한 최선의 노력이었달까요.


하지만 내 상상과 계획이 무색하게 폰케이스를 이용한 대화를 할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들은 내 예상보다 더 상대방의 폰케이스에 관심이 없었고, 코로나로 바깥 생활이 현저히 줄어든 지금은 낯선 사람을 만날 시간 자체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폰케이스가 내 비장의 무기라 믿고 있다. 낯선 상황, 낯선 시간을 유연하게 만들어 줄 내 치트키. 혹시 모르는 사람을 만났는데 갑자기 폰케이스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재미없어도 조금만 들어주세요. 나름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중이구나 하며 맞장구 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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