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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뤼메 Jun 04. 2020

지금 나는 설거지 스킬 레벨업 중

설거지에서 제일 중요한 건 수세미

자취생활을 오래 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은근 기대하는 게 몇 가지 있다. 일단 요리를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웬만한 고장은 혼자서도 뚝딱뚝딱 고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공과금 같은 걸 척척 알아서 내니 진짜 어른의 삶을 보는 것 같다는 경탄을 들을 때도 있다. 하지만 자취생활을 직접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혼자 산다고 모든 걸 알아서 다 해내는 것은 아니라는 걸. 배달이 상용화된 시대에 자취생의 요리실력은 필수품이 아니며, 전등이 나가면 전구 갈아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전등을 안 켜고 살기도 하며, 공과금은 내가 내고 싶지 않아도 어떻게든 알아서 빠져나간다. 그래서 내 자취 경력은 말 그대로 물경력이다. 혼자 산 지는 오래되었지만 막상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이런 내가 자취생활 스킬 중 빠르게 레벨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설거지이다. 설거지만큼은 정말 자신 있다. 아니 무슨 요리도 아니고 설거지에 스킬이 필요하냐고 물을 수 있지만, 설거지야말로 숙련된 스킬을 요구하는 장르이다. 특히 설거지 스킬의 만렙 유무는 기름때 제거로 판단할 수 있다. 간단한 볶음 반찬으로 묻은 기름때를 제거하는 것을 넘어 삼겹살을 해 먹고 남은 고깃기름을 흔적도 없이 제거할 수 있다면, 당신은 설거지 스킬 만렙을 향해 간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냄비 태워먹은 흔적 지우기 등의 돌발상황 설거지거리까지 모두 대처할 수 있다면 비로소 설거지 만렙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이렇듯 설거지 경력을 쌓아가며 설거지를 하는데 필요한 장비도 여러 차례 교체가 있었다. 본캐가 레벨업하기 시작하면 장착하는 아이템도 달라져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설거지 스킬 초반에 쓰던 수세미들

설거지 초반에는 부모님이 쓰던 수세미를 사용했다. 큰 냄비 같은 걸 씻을 때는 네모난 스펀지형 수세미를 들고 박박 밀어댔고, 그  일반적인 설거지를 할 때는 안이 도톰한  수세미를 사용했다. 하지만 부모님 집에서 독립하여 본격적인 자취생활을 시작한 후에는 사용하는 냄비의 크기도 자연스럽게 작아졌다. 그러면서 더 이상 네모난 스펀지형 수세미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자취를 처음 시작하며 알게 된 사실은, 수세미도 썩는다는 것이다. 물이 많이 묻는 수세미가 상할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사실인데, 그걸 몰랐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수세미를 교체해야 하는 시기는 수세미가 헤질 때라고 생각했는데, 꼬릿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 수세미에 충격을 받았던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래서 요즘 수세미는 망사세수미

쌓여가는 자취생활 기간만큼 설거지에 대한 여러 가지 경험치가 쌓이며 요즘 정착한 수세미는 망사수세미이다. 이 망사수세미가 아주 신박하다. 의외로 잘 씻기고, 설거지를 마친 후 수도꼭지 위에 착 걸어두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건조도 된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으니 빨리 마르고, 좁은 주방에서 자리 차지도 거의 없다. 아주 마음에 든다.


한참 기분 좋게 망사 수세미를 사용하고 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수세미 뜨개질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터지기 훨씬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것인데, 4050세대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하여 60-80대 어르신들, 2030대까지 가리지 않고 너도나도 코바늘을 들고 수세미를 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장 기본적인 동그라미 모양으로 시작하던 수세미 뜨기는 끊임없는 변주를 시작하여 온갖 모양의 수세미로 재탄생하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수세미도 실용성만 따지면 안 된다. 수세미야말로 디자인으로 차별화를 둬야 하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수세미도 디자인을 따져야 하는 시대!

이렇듯 설거지의 세계는 내 자취생활 기간만큼 무궁무진하게 변화해가고 있다. 설거지도 장비빨이라고 여러 가지 수세미를 쓰며 예민하고 수세미의 스펙을 비교해보기도 했다. 이런 내가 써보지 못한 수세미가 하나 있는데, 바로 천연수세미이다. 공업용 수세미가 나오기 이전 과거 선조들은 이 '수세미'라는 식물로 수세미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하는데, 의외로 세정력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아마 내가 설거지 스킬 만렙을 찍는 날은 이 천연수세미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날이 되지 않을까?


그렇기에 나는 자취 경력에 맞는 설거지 스킬을 쌓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군분투할 것이다. 언젠가 설거지 스킬 만렙을 찍는 그날을 위하여. 아디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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