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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뤼메 Jul 24. 2020

새벽에 글 쓰는 거 아니랬는데

이 시간에 누가 밖에서 일하고 있길래 써보는 이야기

새벽에는 글을 쓰지 말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새벽은 고요하고, 조용하고, 어두움으로 감성이 충만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새벽갬성 시간에 글을 쓰면 다음날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고 했다. 그때 그 감성이 너무 충만해서 나조차도 그 갬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 그러니 새벽에 혹시나 글을 쓰게 된다면 일단 쓰는 것까지는 좋으니 함부로 '발행' 버튼을 누르지 말라고 했다. 그 '발행'버튼은 다음날 아침 눌러도 늦지 않다고.


지금이 바로 그 글 쓰지 말라는 새벽, 정확히 말하면 새벽 2시이다. 새벽 2시인데 밖에서는 계속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쪽 골목이 폭우로 침수되었기 때문이다(2020. 07. 23 밤 9시 호우경보를 시작으로 부산 전 지역 도로가 폭우로 침수되었다는 안전안내문자를 받았다). 하필 이런 날 바깥 외출을 했다가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물에 침수된 골목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사는 원룸 건물. 분명 나갈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볼일을 다 마친 밤 10시에 다시 집 근처로 돌아와 보니, 이곳은 내 무릎을 넘어설 정도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건물 맞은편 주택에 사시는 걸로 추정되는 주민들도 당황스러운 듯 밖에 나와 있었고,  내가 사는 곳 주변 건물주들로 추정되는 분들이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고 물속을 돌아다니고 계셨다. 물이 무릎까지 찬 상황도 급작스러운데, 당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릎까지 오는 물을 헤치고 걸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제일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비가 미친 듯이 퍼붓는데 다른 데를 갈 수도 없고. 그래서 무릎까지 오는 물을 헤치고 1층까지 물이 찬 원룸 건물 안으로 들어와 무사히 우리 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물에 젖은 옷과 신발을 손으로 빨기 시작했다. 빨래를 마친 후에는 샤워를 했고, 그다음에는 빨래한 옷을 널고 방에 찍힌 발자국들을 다 닦아냈다. 그리고 침대에 누우니 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발자국을 닦는 동안 밖에서는 계속 사이렌 소리,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밖으로 나가보니 형광색 우비를 입은 분들이 길 중간에서 교통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마음이 아팠다. 새벽에 출근했구나. 물난리가 나서.


그렇게 잠도 안 오고 해서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데 이번에는 꽤 긴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보통 사이렌 소리는 집 근처를 지나갈 때 커졌다가 멀어지면서 소리가 작아져야 하는데 이번에는 사이렌 소리가 일정하게 10분 이상 울리고 있었다. 이 새벽에 큰 사고가 난 건가 싶어 다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아까보다도 더 많아진 사람들과 물탱크처럼 보이는 걸 싣고 온 트럭 한 대가 보였다. 그걸 보고 알았다. 아. 이 새벽에 물 빼러 오셨구나. 한참을 울리던 사이렌 소리가 없어진 시간이 새벽 2시였다. 이제 여기에는 형광우비 입은 사람들도, 큰 노란색 트럭도 모두 없어졌다. 마침 비도 잦아들었다.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알게 된 것이 있다. 절대로 저절로 되는 건 없다는 것.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도 더, 미처 내가 알지도 못하는 아주 자잘한 것까지 사람이 직접 조율하거나 조정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 일 투성이라는 것.


사실 나는 물난리가 난 골목을 헤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 와서 물을 빼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문제는 당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당연한 믿음이 있었다. 항상 그랬듯이. 그런데 항상 조용하던 이 시간에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형광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니 '당연히'라는 내 생각이 무척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다행히도 비가 그쳤다. 하지만 우리 골목에 모여있던 형광우비 사람들은 아직 집에 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부산은 거의 모든 동네가 심각한 침수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내가 골목에서 봤던 형광우비 사람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하는 아침이 되기 전까지 이 모든 상황을 최대한 복구해야 한다는 임무를 부여받았을 테다.


그들이 새벽에 바삐 움직여둔 덕분에 나는 내일 아침 밖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건 당연한 일이 아니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니 형광우비군단들은 남들 잘 때 일한만큼 남들이 일어난 시간에는 편히 쉴 수 있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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