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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뤼메 Jan 26. 2019

탈색하고 출근을 해 보았습니다

누구도 말한 적 없지만 암묵적으로 금기시된 사항을 깨 보았습니다 

 나는 소심한 사람이다. 남들 눈치도 많이 보고,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굳이 '그래도 저는 해보겠습니다!'라는 당찬 기질도 없는 편이다. 그저 모든 일이 큰 탈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길 바라는 사람이다. 이런 내가 속으로 품고 있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으니, 바로 탈색이었다.



탈색하고 싶지만

자꾸만 찾게 되는 '하면 안 되는 이유'


 사실 20살이 되자마자 탈색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지 못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친구들도 새로 사귀고 교수님 수업도 들어야 하는데 탈색머리가 너무 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학교에 어느 정도 적응한 21살 때는 비로소 탈색을 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나는 해마다 탈색을 지금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찾아냈다. 알바를 해야 하는데 거기 규정이 엄격해서, 인턴을 하는데 탈색머리가 문제 될 수 있으니까, 큰 마음먹고 미용실 갔는데 탈색하면 안 되는 머리라고 해서, 취준생이라 면접을 언제 볼지 모르니 지금이야말로 검정머리를 유지해야 하는 시기이니까. 


 그렇게 탈색을 하고 싶다는 말만 하며 5년이 흘러갔다. 매번 '탈색하고 싶다'노래만 부르고 탈색을 하지 않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항상 '지금 아니면 할 수 있을 거 같아? 네가 그렇게 하고 싶은 탈색 지금 안 하면 나중에 더 못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자유로운 신분은 대학생 때도 못한 탈색을 회사생활 시작하고 나서 할 수 있을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나이를 먹으면 진짜로 사회적인 암묵적 규율로 인해 탈색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탈색, 그게 뭐라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탈색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머리색. 그게 뭐라고.

탈색하는데

필요한 용기란


그런데 회사에 들어가고 나니 더 애가 탔다. 진짜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드니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찾아낸 대안은 탈색을 한 후, 그 위에 애쉬그린을 올리는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애쉬그린은 출근을 해도 무방할 것처럼 느껴졌다. (왜?)


 그렇게 '탈색하고 싶다' 노래를 부른 지 어언 6년째가 되던 날, 비로소 진짜 탈색을 할 마음을 먹었다. 막상 마음을 먹고 나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머리가 상한다고? 어차피 상한 머리 더 상한다고 무슨 일이 있겠어. 

애쉬그린으로 염색한 후 출근했는데 대표님이 나를 부른다면? 그까짓 거 뭐라 하면 그냥 오징어먹물로 다시 염색하지 뭐. 


그래서 탈색을 했다. 일요일 아침에 자다가 눈을 떠 멍하니 있다 갑자기 무조건 오늘 탈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세수만 한 채 밖을 나가 미용실에 갔다. 그런데 미용실에서 탈색하려니 비용이 너무 비싸 겁 없이 탈색약을 사 와 셀프탈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셀프탈색 후 거울을 보니 너무 탈색이 잘 돼서 내 예상보다 머리가 더 밝아진 것이다. 그때서야 다시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출근을 해도 되나? 너무 겁 없이 일을 저질렀나. 그냥 지금 바로 검은색으로 염색을 다시 할까.'  


그러다 회의감이 들었다. 아니 고작 탈색하는 게 뭐라고 이렇게 오랜 시간 고민하고 스트레스받아야 하는 걸까. 머리색 바꿨다고 일하는 능력이 퇴화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 머리색깔 하나 바꾸겠다는데 이렇게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니. 그래서 그대로 출근을 해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별 일 아니었다

머리색이 바뀐 것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입사 후 2달째 되던 날 탈색을 했고 지금까지 탈색모를 유지하고 있다. 이 머리로 관공서 회의도 가고, 프로그램 진행도 무리 없이 하고 있다. 물론 관계자분들이 처음 나를 볼 때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머리색 때문에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바뀌는 일은 아직까지 벌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정말 머리색 하나 바꾸는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막상 하고 보니 정말 별 일이 아니었다. 그저 가끔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하는 것처럼 머리색을 바꾼 것뿐이었다. 


 물론 회사를 다니면서 파격적인 색으로 염색을 할 수 없는 곳도 많다. 회사는 혼자 생활하는 곳이 아니니 암묵적으로 정해진 분위기와 규율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런데 나는 운 좋게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에 들어와 탈색을 하자마자 다시 검은색으로 염색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다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알 수 있게 되었다. 내 머리색은 내가 일을 진행하는데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게 뭐라고. 그런데 이 용기를 내는데 거의 5-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막상 해보니 별 일이 아니었다는 것. 용기를 내는 게 힘들었을 뿐이지 하고 나니 별 것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 일상을 곱씹어본다. 사실 별 일 아닌데,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찾느라 용기 내지 못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채기 위해서 말이다.

이 머리를 하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제 슬슬 다시 검은머리로 돌아갈까 고민하고 있다. 일단 뿌리염색이 너무 힘들고, 머리가 상하다 못해 바스러지는 걸 보니 이러다 탈모가 올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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